서귀포 대표 해안공원…담수욕으로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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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자구리 해안과 정방폭포
암반 틈새로 솟아나는 산물
담수욕장 개수…축제도 열려
4·3에 희생된 마을, 무등이왓
주민들 정방폭포서 학살당해
서귀포시 서귀동 94-1에 있는 소남머리 절벽 모습. 소남머리 지명은 지형이 소머리 모양으로 생겼다는 설과 소나무가 많은 암석이 머리 모양으로 보이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자구리 해안이 있는 송산동의 옛 지명은 솔동산이다. 소나무가 많은 동산이라는 의미다. 서귀진성이 있는 곳이라 화살에 관련해 살동산이라 전하는 기록도 있다.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자구리 해안 지명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알아보고 4·3의 아픔이 짙게 배어 있는 곳인 정방폭포 주변을 살펴본다.

자구리 해안 지명에 대한 탐색

솔동산이 있는 자구리 해안가에는 자구리물과 소남머리물이 있는데, 여름철 담수욕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자구리물(자구릿물)은 칠십리길 서귀포항 동측 해안가 앞개 여러 곳에서 암반 틈새로 솟아나는 산물이다. 자구리는 옛날부터 물이 풍부해 수도가 가설되기 전에는 이곳에서 물허벅을 이용해 식수로 사용했다

예전에 이곳 인근에 있었던 도축장에서 이 물을 사용했기 때문에 소를 잡으러 가자란 뜻이 와전돼 잡으러자구리로 불렀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어원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밴댕이 작은 물고기를 경기도 방언으로 자구리라 부르는데서 연원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한국전쟁 또는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전국 도처에서 온 사람들이 자구리 해안가로 몰려와 생활한 적이 있었다. 이때 경기도에서 온 이들이 밴댕이 물고기처럼 보이는 자리돔이나 작은 물고기들이 보이는 이곳을 자구리 해안이라 부르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자구리 해안에 바다로 길게 뻗어나간 용암수로.

이곳 동측 절벽 밑에서 자구리물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물이 다량으로 바위틈을 헤치고 솟아나와 바다로 흘러내리고 있다. 현재 이 산물은 담수욕장으로 개수됐다. 관광객들이 서귀포 앞 바다를 관조하는 해안공원이자 탐방 장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용출수를 중심으로 해 여름에는 이곳에서 자구리축제가 열린다. 안타까운 것은 상수도 원수로 이용하려고 자구리 용출수 서쪽을 자구리 광역원 수원지로서 개발했지만, 수질오염 문제로 상수원이 장기간 폐쇄된 점이다. 자구리물에서 동측으로 100m 정도 떨어진 해안가 절벽에 소남머리물(소낭머리물)이라는 산물도 용출된다. 이 물은 절벽 밑 암반 틈의 여러 지점에서 솟아나와 연중 흐르는 물이다. 식수로도 사용했지만 주로 목욕하는 물로 활용됐다.

소남머리의 유래는 지형이 소머리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소남머리라 전해진다. 또는 바다 쪽으로 돌출되어있는 소나무가 많은 암석이 머리 모양으로 보인다는 데서 소남머리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지금도 해안가 언덕에는 소나무들이 군락으로 숲을 이루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의 냉동공장에서 이곳에서 용출되는 물을 사용하기 위해 이곳을 정지작업 하기도 했다. 현재는 남탕과 여탕으로 구분돼 있다. ·여탕 앞 넓은 곳에는 남녀 구분 없이 노천욕을 즐길 수 있도록 원형의 노천탕도 만들어 놓았다. 지금도 이곳 서측 절벽에서는 용출하는 소남머리물을 만날 수 있다.

소남머리 노천탕.

정방폭포와 4·3 그리고 무등이왓

정모시 수원지가 형성하는 정방폭포 주변에는 서불기념관, 남당머리, 작가들의 산책로, 주정공장 등의 폐수를 깊은 바다로 보내는 통로로 여겨지는 수로, 특히 용암유로와 나란히 인공수로를 관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또한 4·3의 아픔이 짙게 배어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시설된 주정공장은 4·3 때 중산간마을을 초토화하면서 붙잡혀 온 양민들을 수용했던 곳이다. 그리고 260여 명이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학살의 현장이다. 특히 무등이왓 주민들이 1948년과 1949년 겨울 볼레오름에서 붙잡혀와 이곳에 수용됐다가 정방폭포에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해야 했던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다

무등이왓은 4·3 당시에는 동광리의 가장 큰 중심마을이었다. 그러나 4·3 이후 마을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무등이왓은 300여 년 전에 설촌된 마을로 주민들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무등이왓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았다는 의미도 있고, 무등(無等) 즉 등급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선각자들이 사는 고장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전한다

4·3은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고, 진취적이었던 이 마을을 영원히 앗아가 버렸다. 또한 초토화작전 이후 뿔뿔이 흩어져 숨어살던 무등이왓 주민들도 강력한 토벌로 인해 목숨을 잃어야 했다. 현재 마을터에는 제주도에서 세운 잃어버린 마을 표석만이 남아 찾아오는 이를 맞이하고 있다

마을주민의 희생은 19481115일에 시작됐다. 군인 토벌대들이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10여 명을 우영팟에서 총살했다. 1121일에는 마을이 전부 소개됐다. 집들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하자 주민들은 마을 근처에 숨어지내야 했다. 주민들은 마을에서 떨어져 있더라도 좀더 안전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주민들은 주로 도너리오름 곶자왈에서 숨어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나중에 큰넓궤를 발견하고, 폭설이 쏟아지자 이 굴로 숨었다. 큰넓궤는 험한 대신 넓었고, 주민들이 숨어 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 후 이 굴로 찾아든 주변 마을주민들은 120여 명이나 됐다.

당시 모슬포 주둔 국군 제9연대(연대장 송요찬 중령) 3대대(대대장 이철원 대위) 토벌대들은 동광마을 소개 이후에도 계속해서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학살했다. 특히 19481212일과 13일에 있었던 잠복학살은 토벌대의 비인간적인 만행으로 주민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잠복학살이란 토벌대가 주민 일부를 학살하고, 학살된 시신들을 거두러 오는 유족들을 숨어있다가 다시 학살하는 사건을 말한다. 시신을 수습하려고 주민들이 모여들자, 무등이왓 대나무밭에 숨어 기다리던 토벌대가 나타났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한 곳에 모은 뒤 그 주위에 짚더미나 멍석 등을 쌓아 그대로 불을 질렀다. 생화장을 시킨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질식한 채 무서워 벌벌 떨며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원통하게 죽어갔고, 어른들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살아 보려고 바둥거리다 죽어갔다. 널려진 빨래처럼 시체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진 채 쓰러져 죽은 모습들을 본 마을 사람들은 잔인한 학살에 대한 분노를 안으로 삼키며, 언젠가는 자신들도 당할지 모르는 죽음의 위협 때문에 더욱 꽁꽁 숨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여성과 어린이 등 노약자가 대부분이었다.

50여 일 동안 피신해 있었던 큰넓궤가 토벌대에 발각된 후 무등이왓을 비롯한 동광리 주민들은 눈이 무릎까지 차오른 산길을 걸어 영실 부근의 볼레오름까지 올라가 피신했다. 피난민들의 남긴 눈 위의 발자국을 따라 산을 에워싸며 올라온 토벌대는 보이는 사람들을 체포하거나 총살했다

볼레오름 근처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동광리 사람들을 비롯한 인근 감산리 등지의 사람들도 포함돼 있었다. 토벌대는 붙잡힌 주민들을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의 단추공장 건물에 일시 수용했다가, 정방폭포 위에서 모두 집단학살했다. 그중에는 동광리 주민들이 가장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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