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 없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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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봄볕이 더없이 따습다. 앞 동 마당에 부려 놓은 이삿짐이 서두르는 기척이 없다. 제주만의 세시풍습인 신구간 개념이 사라지는 걸 보며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보름 동안 이어지던 이사 풍경은 북새통이나 다름없었다. 이삿짐이 들고나는 꼬리가 서로 맞물려 부산했는데, 요즈음은 신구간이라도 움직이는 기미가 뜸하다.

한동안 건축 붐을 일으켰던 신주택지를 갈 때가 있다. 새 건축물로 동네는 외양으로는 산뜻하고 깨끗했다. 하지만 건물이 비슷비슷 한데다 마당 한 뼘 없이 건물로 들어차 삭막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울타리가 없어 개방된 느낌은 들었으나, 나무 한 그루 심을 수 없는 게 아쉬웠다. 물론 한정된 대지에 건물을 올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수십 년 후 이 동네가 어떻게 변할지가 궁금해지곤 한다.

처음 제주 생활에 적응해가면서 대문을 활짝 열어 놓은 풍경을 보곤 적잖게 놀랐다. 도둑이 없는 섬이라지만 열고 잠그고 확인까지 하던 습관에 길들었던 나로선, 위태롭고 불안해 보일 뿐이었다. 어느 날부터 식구들이 모이는 저녁 무렵에 나도 현관문을 열어 놓기 시작했다. 언뜻언뜻 앞가슴 풀어헤친 것처럼 허전해, 휑하니 열린 문에 시선이 가면 슬그머니 손이 가슴으로 올라갔다. 요즈음은 사회적 불안 요소가 많아 대문을 단속하는 집이 늘어날 정도로 달라졌다.

경기도 신도시의 신흥주택지에 지은 집을 구경하게 됐다. 집집마다 담은 물론 대문도 없는 게 시선을 끌었다. 집과 집 사이 회양목이나 어린 쥐똥나무로 바자를 삼았고 뜰에는 잔디를 심었다. 현관으로 이어진 띄엄띄엄 밟기 좋게 놓인 검은 징검돌이 정겹다. 담이 없어 나신처럼 가리지 않은 건물이 허전할 것 같은데, 뜰 가운데 수형이 단아한 노거수 감나무 한 그루가 정원의 주인공이었다. 거실 유리창 한쪽을 그늘로 가리는 멋스러움이 주인의 안목을 말해 주는 듯했다. 뛰어난 식견과 심미안을 지녔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집은 곧 주인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자 얼굴과도 같다. 겉은 외모를 안은 정신의 곳간이다. 단순히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니라, 겉과 안의 치레도 감각이 필요하다.

인상적인 것은 옆집과 이어진 뜰이다. 흔한 관념 속의 집과는 사뭇 달랐다. 서로 담을 두르지 않아 현관을 나서 뜰을 건너면 바로 옆집과 연결이 된다. 터놓고 지내는 사이거나 모르는 이웃이라도, 자연스럽게 한집안 식구처럼 어울려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있었다.

담은 허허로운 마음의 가림막일 뿐이며, 담에 어깨를 걸친 대문은 곧 길의 시작이다. 문을 나서면 세상으로 나가는 출발점이며, 사람이 드나들기 위한 출구이자 소통의 길이다. 세상의 풍문과 이웃의 정이 드나든다. 담을 없앰으로써 마음의 벽을 허물고 안에서는 따뜻한 가족과의 소통, 밖으로는 이웃과 내왕하는 집이 된다면 우리 사회는 한결 따뜻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초여름부터 선선한 바람이 불 때까지 대문 격인 현관문을 열어 놓고 생활한다. 적막할 만큼 고즈넉한 분위기에 옆집에 어린아이를 키우는 집이 이사를 왔다. 통통 뛰어다니는 아이들로 미안해하지만,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워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라며 웃어넘긴다. 문을 기웃거리다 방긋 웃으며 “안녕하세요?”하는 배꼽 인사를 받을 때마다, 귀한 아이들에게 따뜻한 에너지를 듬뿍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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