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제주 선비를 가르치고 이끌었던 오현의 한 사람
(131) 제주 선비를 가르치고 이끌었던 오현의 한 사람
  • 제주일보
  • 승인 20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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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호, 조선 후기 대정현감
 김정①, 유배 중 풍토록 지어
 김정②, 제주 삼천서당 창건
 김정로, 사회주의 항일 활동
 김정맹, 학생 동맹휴학 주도

김재호金在浩1778(정조2)~?, 문신. 대정현감. 김명혁(金命爀)의 아들로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본관 청주이고 자는 양직(養直)이다.

1809(순조9) 문과 원자탄생 증광시(元子誕生 增廣試)에서 병과로 합격했다. 1825(순조25) 3, 부사민(夫士敏)의 후임으로 대정현감에 도임했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마애명이 방선문(訪仙門)에 남아 있다

1825년 대정현 인성촌에 이전부터 있었던 치롱재(癡聾齋)를 윤경당(潤經堂)이라 개편(改扁)했는데, 이 건물은 현감의 정당(政堂)이었다

1827년 장령으로 발령, 제주를 떠났다. 김재호가 떠난 후 서정을 개혁했다는 공로로 대정향교 문 밖에 애사비(愛士碑)가 세워졌다

김정金淨①:1486(성종17)~1521(중종16), 문신, 학자, 유배인. 제주 오현(五賢)의 한 사람. 자는 원충(元沖)이고 호는 충암(沖菴) 혹은 고봉(孤峯)이다.

본관은 경주고 충청도 보은에서 호조정랑 김효정(金孝貞)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정의 문집인 충암집(冲庵集)’ 4에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내용을 적은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이 수록돼 있다

김정은 기묘사화로 극형에 처해졌지만,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도움으로 감형돼 금산에 유배됐다. 이후 진도로 이배(移配)되고 1520(중종 15) 8월 다시 제주로 옮겨졌다

적소(謫所)는 성안 가락천 동북쪽에 있던 금강사라는 황폐된 절의 작은 집이었다

도민의 이속적인 문화생활을 이해하면서 흥학교화(興學敎化)에 힘썼다. 제주풍토록은 문신 김정이 제주도 유배 생활에서 체험한 풍토와 상황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글이다.

이 글은 실 체험을 바탕으로 16세기 제주 지역의 풍토와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낸 최초의 제주 풍토지이며,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수필로 평가된다. 그의 문하생으로 제주 교수 김양필(金良弼)과 문세걸(文世傑)이 배출됐다.

152110월 예조판서 김인손(金麟孫)과 채소권(蔡紹權) 등이 과거 금산에 있을 때 배소를 떠나 보은(報恩)에 있는 노모를 만나고 왔다며 김정의 유배소 이탈 문제를 제기했다

임금은 유배지에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사사(賜死)의 명을 내렸다. 15211017일 제주에서 사약을 받은 김정은 술 한 모금 마신 다음 형제에게 노모의 봉양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김정②:1670(현종11)~1737(영조13), 문신, 학자, 제주목사. 경상도 영주 태생으로 자는 사달(士達), 호는 노봉(蘆峯)이다

아버지는 김휘봉이고 어머니는 봉화 김씨 성휘의 딸이다.제주목사로 재임했고, 1736(영조 12)에 삼천(三泉)서당을 창건하는 등 학문 발전에 이바지했다. 1737(영조13)에 목사 재임 중 병사했다. 제주도민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삼천서당 앞에 노봉김정흥학비(蘆峰金政興學碑)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김정로金正魯1907(융희1)~?(분단시대), 제주의 신인회(新人會) 및 제주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에서 항일 활동을 펼쳤다

제주시 이도동 제주-성안에서 태어났고 원적지는 제주시 이호리 백개

방성칠(房星七)란 때 창의(倡義)에 나선 김남윤(金南胤)의 손자이고, 한말에 제주군수를 역임한 김창호(金昌鎬)의 차남이다

항일에 기여한 김정순(金正舜)은 그의 맏형이다

서울 경성(京城)중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신진 청년들이 용연(龍淵)에서 반역자구락부라는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할 때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1925년 반역자구락부의 좌파 회원들이 신인회로 조직을 개편, 사회주의 운동을 표방했다.

1927년 봄 제주청년동맹이 조직되자 도내에 산재한 청소년단체의 통합을 도모했다. 특히 제주읍내 샛별소년단의 조직 과정을 청년동맹 간부 김정로(金正魯), 강창보(姜昌輔) 등이 담당했다. 또 제주청년회 집행위원을 지냈고 19251123일 창립한 경성(京城)학생연맹에 가입했다

경성학생연맹 창립회원 20명 중 제주 출신으로는 김정로 외에 박찬식(朴燦式), 윤석원(尹錫沅) 등이 참여했다

19279월 송종현(宋鍾炫)의 권유로 공산주의자가 돼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고 야체이카를 조직, 회장이 됐다. 같은해 11월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82월 제주공립보통학교(제북교) 동맹휴학 사건으로 동교생 9명이 검속, 그 배후 인물로 지목돼 제주청년회 간부 김정로, 윤석원과 샛별소년회 지도자 송택원(宋澤元)이 일경에게 취조를 받았다

19288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돼 19301222일 경성지법에서 2년형을 선고받아 19289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 거주, 19318월경 김창수(金昌洙)와 함께 비밀 출판물을 국내로 우송했는데 이 사건으로 1932년 일경에 의해 수배됐다

1934년 경남 창원군(昌原郡)의 가덕진(加德鎭)소년회와 눌지리(訥知里)소년회를 조직했고, 메이데이 시위를 주도했다

19359월에 동지들을 격려할 목적으로 조선총독 암살을 운운한 통신물을 발송, 19382월 경상남도 경찰부에 검거됐고 출옥 후 목포(木浦)에서 거주했다. 조국이 해방되자 목포에서 건준(建準) 결성에 참여한 후 제주로 귀향했다

김정맹金精孟1917(일제강점기)~1969, 신창독서회에 가입했고, 항일학생 운동과 혁명적 제주도 농민조합운동의 항일활동 등을 펼쳤다. 일명 김정익(金精益), 본관 김해

한경면 두모리 두미에서 김원규(金元圭)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55일 한림보통학교 재학 중 홍창주(洪昌柱)와 함께 1일 간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당했다. 이때 일본인 학교장에게 첫째 노예교육 폐지할 것, 둘째 교과서를 무상 배포할 것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1948년 제주교원양성소를 졸업, 중학교 교사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195010월부터 1968년까지 성산중, 신창중, 무릉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8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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