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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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수필가

우리 집에는 어림 내 키보다 큰 나무 이십여 그루가 울타리를 지키고 있다. 겨울이 되어도 푸름을 잃지 않는 사계절 나무도 있고 잎을 떨구고 겨우내 숨을 고르는 낙엽수들도 있다. 이 모두 우주 질서에 의한 본능적 규율을 지킴이리라. 봄이 되면 사철나무는 푸름이 더 돋보이고 봄기운을 받은 낙엽수는 하루가 다르게 동면에서 깨어나 봉긋이 새싹을 밀어 올리며 천지로 생명의 태동을 뿜어낸다.

이맘때면 나는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서서히 나무 손질할 준비를 한다. 예전만 해도 나무 손질이 서툴러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면 무성해지는 잎과 가지는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한두 그루 아니고 그냥 놔두었다간 울타리가 흉물스럽게 되기 십상이라 울며 겨자 먹듯이 톱과 가위를 들고 대충 잘라냈었다. 나무들 입장에서 보면 서툰 이발사에게 머리를 맡긴 꼴이 됐으니 주인을 잘못 만나 불행에 처한 셈이다. 나의 미숙한 솜씨를 알기에 유비무환의 자세로 미리미리 서두르다보니 버릇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한 덕에 이제는 가끔 지나가던 사람들이 들여다보며 정원 손질 잘 했다고 인사하는 경우도 있고, 나무 손질할 때 타박만 하던 안 사람도 아무 말 않는 걸 보면 숙달된 나의 실력을 인정하는 눈치다. 정원수 중에는 토종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이 감나무는 내 어린 시절의 미련이 남아 특별히 심어 아껴온 나무다. 내가 자라난 시골마을을 떠올려보면 어느 집이나 토종 감나무 한두 그루는 있었다. 여름이 되면 풋감을 따내어 절구통에서 빻아 즙을 내어 천연 염료를 만들었다. 이 염료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 제주도 유일한 전통 노동복 갈옷 즉 갈중이다. 갈중이는 어려운 시절 제주도 농어민들과 동고동락을 함께 해 왔다. 힘들고 궂은일을 함께 묵묵히 해 오던 갈옷이 최근에는 세련된 멋쟁이 패션으로 탈바꿈하면서 한때 유행을 누리기도 했다.

우연인지 안 사람도 갈옷 만들기를 좋아하다 보니 우리 집 토종감나무는 더욱 대접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붐을 일으키던 갈옷 바람이 시들해지면서 염료로 기여하던 감나무도 관심 밖으로 차츰 밀리는 처지가 되어갔다. 애지중지하던 감나무가 오히려 볼 때마다 자꾸만 눈에 거슬려 차라리 베어버릴까 생각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한 거였다. 필요 없는 나무는 잘라내는 게 당연지사 무슨 대수인가. 그런데 잠시, 가슴 한편에 묻혀있던 양심의 소리가 고개를 내민다. 아뿔사!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수년 동안 묵묵히 정원을 지키며 어렵사리 맺힌 열매들을 익어 보지도 못한 채 고스란히 내주지 않았던가. 그 공로는 아랑곳 않고 쓸모없다고 잘라내려는 나의 행동에 동의할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역할을 바꿔주기로 했다. 넓고 높이 뻗어 오른 가지들을 잘라내고 수확 위주가 아닌 관상용 분재 형으로 손질을 해 봤다. 웬걸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멋스러운 폼으로 탈바꿈 하는 게 아닌가. 감나무 덕에 덩달아 정원이 한층 격이 높아졌다. 감나무도 신이 나서 새로운 배역을 톡톡히 할 기세다. 잠시나마 이율배반 했던 내 생각이 부끄러워진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혹여 사려 깊지 못한 섣부른 나의 행동이 그 누구에게 상처를 안겨주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상황은 언제라도 바뀌게 마련이다. 그러나 바뀐 상황에 맞춰 각자의 특성을 살려 모두가 상생하는 방향으로 슬기롭게 발상의 전환을 해 볼 일이다. 대문을 나서기 전 잠시 멈춰 서서 감나무를 바라본다. 새로운 식구 하나 얻은 기분이다. 감나무도 말없이 안도의 숨을 내 쉬며 미소를 보이는 듯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자연이 스승임을 다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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