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해방 후 초대 곽지리장…남다른 한시 사랑도 눈길
(132) 해방 후 초대 곽지리장…남다른 한시 사랑도 눈길
  • 제주일보
  • 승인 20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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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봉, 영조 14년 정의현감
 김정언, 영주음사 활동 몰입
 김정원, 정온 위해 서재 건립
 김정준, 전라도관찰사 재임
 김정태, 무과 종4품에 임명
 김정탁, 신흥리지 공동 편찬
농업학교 교정으로 바뀐 귤림서원터의 오현단. 김정언은 1962년 ‘제주-성안’으로 이주해 오현단 내부에서 활동한 영주음사에 참여했다.
<출처 :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김정봉金廷鳳생몰년 미상, 정의현감. 1738(영조 14) 2월 허승(許昇)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동년 6월에 떠났다

1738년 중국 절강(折江) 사람 오서신(吳書紳)이 정의현 토산포에 표도, 오금궤(烏金憒)를 빠뜨린 것을 애석히했으며 그들은 일본 장기(長崎)에 밀려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들어간 조선 사람은 그 자손이 한 마을을 이루어 조선말을 쓰면서 살고 있다고 전했다.

제주향교 석전제 헌관으로 참여한 김정언.
제주향교 석전제 헌관으로 참여한 김정언.

김정언金廷彦1892(고종29)~1983, 문인, 개량서당 교사, 제주도 한시 고시관. 호는 면헌(勉軒). 곽지리 답단이와 대림리 선돌개량사숙 교사, 영주음사 회원

1962제주-성안으로 이주하여 영주음사 활동과 한시(漢詩) 작성에 몰입하게 되었다

그는 김균배(金勻培·조천읍 북촌)와 함께 한라문화제 한시 백일장(白日場)의 고평(考評)을 담당, 1983년 우연히 두 분이 작고하니 백일장도 종언을 고했다. 편저 곽지지, 또 한시도 많이 남겼다

애월읍 곽지리 -에서 무과급제 김기현(金沂鉉)의 손자이며 김재천(金在天)의 장남으로 태어나 영남학파의 허방산(許舫山)의 문하생 교원(敎員)인 일헌(一軒) 장성흠(張聖欽)의 문하생이다

애월면 초기 회계원으로 재임하다가 교학에 뜻을 두어 한림읍 대림리와 향리에서 오래 개량사숙의 교사로 근무했다

1945년 해방이 되어 초대 곽지리 이장으로 뽑혔다. 선친이 학교 부지를 쾌척(快擲)하니 초등학교 건물을 준공하자 그는 영주음사(瀛洲吟社) 사장 최원순(崔元淳)에게 의뢰하여 전도 백일장을 개최하는 데 일익(一翼)을 담당하였다. 김동흡金東洽의 부친이고 서울의 김용성金勇成김호규金昊圭의 증조부

김정언의 시=‘파리장서巴里長書願吾獨立檄書成독립을 원하는 격문에는 /日帝凌侵字字明일제의 능욕이 글자마다 보이네 /民族安歸無寄命겨레의 안녕이 의지할 수 없어 /儒林團合有聯名유림들의 연명으로 뭉쳤도다 /報知萬國圖光復나라의 광복을 만국에 알려 /憂積十年忘死生근심 쌓인 10년을 죽고 살기를 잊었네 /三千疆土蕭條理우리 강토 쓸쓸한 가닥이라오 /陳設同胞痛憤情동포여! 통분함을 모두 설파했네

파리장서巴里長書:1919년 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동이 되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탄원서를 보내려다 발각된 사건. 유림대표 곽종석郭鐘錫, 김복한金福漢 137명이 작성하여 보내려다 발각되어 곽종석, 하용제河龍濟, 김복한 등은 옥중 순사하였다

김정원金廷元생몰년 미상, 대정현감. 1613(광해군5) 12, 한계함(韓繼咸)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616(광해군8) 8월에 떠났다. 이 무렵 정온이 제주로 유배되었다.

동계(桐溪) 정온(鄭蘊)1614(광해6) 전라도 해남에서 승선하여 대정의 유배소에 도착한 때가 동년 8월이며 당시 나이는 46세였다. 적사(謫舍)는 대정객사의 동문 안에서 북쪽으로 수십보 들어간 성벽 안의 한 민가를 안치소安置所로 삼았다

안치소는 가시 울타리로 두르는 것이 국법이므로 이 집 주위도 산죽(山竹뉴목(杻木진시(眞柴) 등으로 틈 없이 10여척 높였다

대정현감은 특별히 적소 경내에 서재(書齋)용으로 두 칸 되는 집을 지어 주었다

이 집은 성벽에서 4·5척 떨어진 서향집인데 가지고 온 수백 권의 책을 두어 독서에 몰두, 따라서 대정에서 편집한 덕변록(德辯錄)’을 편술하여 자성서(自省書)로 하고 정월 원단(元旦)에는 반드시 자경침을 지어 연중 자신을 경고하였다

이듬해부터 농사도 조금씩 시작했다. ‘약파만록(藥波漫錄)’에 의하면 적도십여년 내유일(謫島十餘年 乃有一妾)”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방 여인을 소실로 삼아 반려자 역할을 하게 한 듯하다

김정준金廷雋?~1433(세종25), 전라관찰사, 제주목사. 일명 김정준(金廷儁). 본관은 나주, 호 월당(月塘). 조선 태조 대부터 세종 때까지 관계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나주김씨의 족보에 의하면 경기좌도 판관, 회양(淮陽)부사, 광주(廣州)목사, 제주목사, 호조참의, 경차관, 해주목사, 함길(咸吉)도관찰사 등을 역임, 1410(태종10) 1, 목사 정초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4124월 호조참의로 떠났다.  

김정준의 회명연시(會盟宴詩)’는 유명하다. 奔走猶存犬馬誠 말을 바삐 달려가는 정성을 보여 /輿人何事奉書牲 남과 더불어 어떤 일이든 희생정신을 /千年幸際風雲契 천년 다행한 풍운을 약속하오 /聖主賢臣復會盟 임금과 신하가 다시 맹세하네 /從來家風忠孝誠 본시 가풍은 충성과 효성이요 /君臣會盟結犧牲 임금과 신하는 희생하기로 맹세했소 /子孫相繼花樹會 자손들은 서로 화수회로 이어가고 /千年斯道共守盟 천년 길이 이 길을 지키자고 맹약하네/

한편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 함께 재임한 제주판관은 유유녕(柳維寧)이다

김정준의 조()는 고려 말 목은 이색(李穡) 등과 창주하며 당대에 문명을 드날렸고 덕망이 높았으며 보문각 대제학에 이르셨던 월당 대경(臺卿)이니 시호는 문충이고 저서로는 월당집을 남기셨다

공의 부친은 1347(충목왕3) 문과급제 후 여러 관직을 지내시고 고려 말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한 가구(可久)이며 모친 안동권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총제공 김정준(金廷儁)은 조선조 태조 때부터 출사하여 조선왕조실록에 모두 24건이 기록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태조 때 2, 태종 때 17, 세종 때 5건 등이고 그 후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402(태종2) 회양부사, 1404(태종4) 상호군(25위의 최고 지휘관), 1406(태종6) 광주廣州목사, 1411(태종11) 제주목사, 1412(태종12) 제주도안무사, 1413(태존13) 호조참의, 경차관, 1414(태종14) 전라도 관찰사, 1415(태종15) 해주목사, 1418(태종18) 함길도 도관찰사, 1418(세종1) 함길도 병마도절제사 겸 길주목사, 1421(세종4) 전주부윤 등을 역임하는 등 조선을 개국한 태조 때부터 정종, 태종을 거쳐 세종조世宗朝에 이르기까지 조정의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김정태金鼎台생몰년 미상. 17645월 무과 종4품 제주산마감목관에 임명되었다.

김정탁金正卓1890~1945. 조천읍 신흥리 -에서 김해김씨 근암(謹庵) 김성화(金成華)71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숙부 만호(萬戶) 김성집(金成集)이 왜구의 침입에 적극 대처하고 또 선친께서 이웃 조천리와 함덕리의 세력에 몰려 왯개 倭浦를 분향(分鄕) 독립시켜 자주정신을 드높였다

그는 후일 제주의 석학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과 초대 조천면장 혁암(革菴) 김형식(金灐植)을 만나 향사(鄕史)에 관한 자문을 받고 그 유명한 新興里誌로 일제강점기를 밝히고 마을 후진을 통해 1964년까지 계속 써내려온 전형적인 마을지이다

송강(松江)은 신흥리 마농-에 묻히고 마을에서는 기념비를 세워 우러러 보았다. 한편 외손녀 김순자(金順子)는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고향에 신흥리복지회관(新興里福祉會館)을 자비로 건립하고 20억원을 투자해 좌수반(左洙磐)장학문화재단을 설립한 여걸(女傑)이다.

증손 김의철(金義哲)은 한의사로서 선조의 위업을 이어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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