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떠나는 길 위로했던 사라봉 낙조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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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동문한질과 고마장
고우니모루서 제주항 관망
영주십경 중 2경 사봉낙조
현 고마로 주변 목마장 흔적
매년 목축문화 재현 축제도
숨이 고웃고웃 차 오른다고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는 고우니모루 언덕에서 숨을 고르고 사라봉에 오르면 제주항 전경이 내려다 보인다. 저녁에는 영주십경 중 2경인 ‘사봉낙조’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숨이 고웃고웃 차 오른다고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는 고우니모루 언덕에서 숨을 고르고 사라봉에 오르면 제주항 전경이 내려다 보인다. 저녁에는 영주십경 중 2경인 ‘사봉낙조’의 장관을 볼 수 있다.

이번 주부터는 옛 제주목 성 밖에 위치한 마을들의 숨겨진 역사문화를 찾아 길을 나선다.

제주목은 동쪽으로는 조천읍과 구좌읍, 서쪽으로는 애월읍과 한림읍, 그리고 한경면 일부를 포함하는 제주에서 가장 넓은 행정구역이었다

광해 임금 원년인 1609년 한양에서 제주목을 중심으로 제주도 지형을 좌면과 우면 그리고 중면으로 나눴다

이후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은 제주목 서쪽은 1786년부터 신우면(애월)과 구우면(한림)으로 제주목 동쪽은 1874년부터 신좌면(신촌함덕)과 구좌면(김녕세화)으로 개편됐다

일제는 1935년 면 소재지의 마을 명칭으로 면의 이름을 바꿨다. 신우면은 애월면으로, 구우면은 한림면으로, 신우면은 조천면으로 개편됐다. 그러나 구좌면은 유일하게 옛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동문한질 풍경과 고마장 풍경을 살펴본다.

고우니모루에서 모충사로 옮긴 김만덕 관련 석물들.
고우니모루에서 모충사로 옮긴 김만덕 관련 석물들.

동문한질을 넘으며 만나는 풍경

탐라국 시대에서부터 세워진 제주도성을 오가기 위해서는 동문인 연상루(延祥樓), 서문인 진서루(鎭西樓), 남문인 정원루(定遠樓)를 지나야 했다. 제주읍성 3문 중 바다를 건너는 관리들이 오가는 문은 동문인 연상루이고 동문 밖 큰길은 동문한질이다

제주목 성 밖 동녘길로 가려면 우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진 연상루를 나서야 한다. 제주를 건너기 위해서는 동문한질을 지나 화북포구나 조천포구로 향했을 것이다. 동문한질에 나선 객은 먼저 군사 훈련장인 연무정에서 말을 타고 화살을 날리는 군사들의 훈련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연무정은 지금의 제주동초등학교 근방에 있었다

연무정을 지나면 말떼들이 잡풀을 뜯는 곶자왈의 넓은 목장 지대도 만날 수 있다. 이 지역이 두무니머세라 불리는 지금의 두멩이 골목 지역이다. 그리고 근방 넓은 곳에는 고마장이 있었다

연무정과 두무니머세 지경을 지나 이어지는 언덕을 오르면 그곳이 건들개(건입포)가 내려다보이는 고우니모루이다

동산을 오르려니 숨이 고웃고웃 차 오른다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는 고우니모루 언덕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1812년부터 고우니모루에 잠들던 은광연세(恩光衍世) 김만덕은 1977년 문을 연 사라봉 모충사 구휼의인 김만덕 기념탑 아래 잠들어 있다

제주바다를 건너려니 수심에 찬 사람들은 영주십경(瀛州十景)2경인 사봉낙조(沙峰落照)의 장관과 광활한 고마장과 테우리의 말 모는 소리들을 보고 듣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도 했을 것이다

제주는 예로부터 말의 별자리인 방성(房星)이 비치는 땅으로 알려져 왔다. 방성이 상징하는 동물인 말은 고대로부터 제왕 출현의 상징으로도 여겨 신성시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을 보유하고 다루는 능력이 곧 국력이라 여길 정도였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말과 관련 있는 별자리인 방성(房星)을 말의 수호신, 즉 마조(馬祖)라고 해 제사를 지냈다

태조 이성계는 서울 동대문 밖에 마조단을 설치해 제사를 지냈고 제주에서도 마조단을 설치해 제사를 지냈는데 제사 지낸 터가 일도리에 있는 지금의 KAL호텔 자리이다

지금도 송당 지역에서는 아부오름 등지에서 말의 번식, 농사·가족·마을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선인들의 고마장 목축문화를 재현하기 위해 일도2동에서 고마로 축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고마로에 세워진 말 동상.
고마로에 세워진 말 동상.

고마장(古馬場)을 일군 제주선인들

고마로축제로도 널리 알리진 이곳은 제주의 역사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사라봉 기슭과 신산모루 그리고 신선동으로 이어지는 넓은 들은 조선시대 목마장이 들어섰던 곳이다

특히 지금의 고마로 주변에는 당시에 세워진 고마정 등 여러 유적도 둘러볼 수 있다. 사라봉 기슭과 별도천 서쪽에 자리 잡은 속칭 김안뜨르평지에서 가령동산 윗지경까지 길게 펼쳐진 울창했던 곶자왈 지대가 바로 예전의 고마장 지역이었다

조선조 정종시 연안김씨 입도조 김안보는 일도리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그의 아들 김복수는 거로 지경에 있는 속칭 청방터에 거주하면서 김안뜨르에 1000여 정보의 목마장을 개척했다

영주십경 중 하나인 고수목마를 재현한 모습. 사진 제공=신승훈
영주십경 중 하나인 고수목마를 재현한 모습. 사진 제공=신승훈

수천 마리의 말떼가 방목되는 이러한 모습이 영주십경의 고수목마(古藪牧馬)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역사문화를 담고 있는 지역의 이름이 지금의 고마로이다

고마에는 또 다른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말을 빌려준다는 의미의 고마장(雇馬場) 역사문화도 이곳은 지니고 있다. 한양 등지에서 오가는 관리나 지방관인 목사와 현감의 행차에 필요한 말(쇄마·刷馬)을 기르던 곳이기도 하다. 고마장(雇馬場)은 사라봉의 동남쪽 지경(지금의 영락교회 부근)에서 서쪽 일대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연안김씨(한림학사공파 종중회)에서 2017년 펴낸 연안(延安)’에 따르면, 연안김씨 입도조로 알려진 김안보는 고려 말에 한림학사를 지내다 제주도에 낙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지의 고려 유민 유입 항목에 의하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던 격변기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헤어져 제주도로 왔다고 한다

그의 아들 김복수가 제주성 동문한질 밖에 거로마을을 형성하고 고마장 1000여 정보를 개척해 말 목장을 경영한 이후 4대에 걸쳐 마장을 세습 운영하니 그 규모가 거대해졌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시 고마장이 국영마장으로 징발되자 나라에서는 그 보상으로 함덕과 성남지구인 지금의 죽성부락에 각각 1000여 정보의 황무지를 환지해 줬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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