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의 탄생과 역사의 흔적이 한곳에…
탐라의 탄생과 역사의 흔적이 한곳에…
  • 제주신보
  • 승인 202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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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삼사석과 능동산 방묘
삼을라가 화살을 쏜 삼사석 
김정 목사가 삼사석비 세워
유력계층 조성 능동산 방묘
제주성주 고봉례 묘로 추정
제주도 기념물 제60-4호인 능동산 방묘의 모습. 거로마을 진입로에서 동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동산에 있는 이 묘는 제주의 마지막 성주인 고봉례와 그의 부인인 문씨를 합장한 쌍묘로 알려졌다.
제주도 기념물 제60-4호인 능동산 방묘의 모습. 거로마을 진입로에서 동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동산에 있는 이 묘는 제주의 마지막 성주인 고봉례와 그의 부인인 문씨를 합장한 쌍묘로 알려졌다.

화북동은 제주시 동부권의 생활 중심지로서 예전부터 제주의 관문인 화북포구를 통해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또한 제주의 역사·문화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역사박물관 같은 곳이기도 하다.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화북동에 있는 역사유적지를 간략히 살펴보고, 탐라국의 시조인 삼신인과 관련된 삼사석과 탐라국 성주의 묘로 추정되는 능동산 방묘를 살펴본다.

제주 역사·문화를 품고 있는 화북동

부록마을과 거로마을 그리고 화북1·2동으로 이루어진 화북동은 제주의 역사·문화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노천박물관 같은 곳이다.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지만, 역사서에 기록된 유적도 많다.

화북동에는 탐라국 마지막 성주인 고봉례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능동산 묘와 1000여 년 전 지어진 소림사라는 절이 있었던 절동산, 삼별초와 관련된 동제원 전투, 4·3으로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육지로 오가는 길목인 화북포구와 목사·판관 등의 비석이 있는 비석거리가 있다.

또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구축한 화북진성과 별도연대, 그리고 환해장성, ··부 삼성이 영지를 점하기 위해 화살을 날려 돌을 맞혔다는 삼사석, 어명으로 목사가 해신제를 올렸다는 해신사, 고랫물과 금돈지물 등 수많은 용천수 물통, 사라봉과 별도봉에 파헤쳐진 일제의 진지동굴, 윤동지 영감당, 황사평 천주교 묘역도 있다.

이렇게 제주의 수많은 역사·문화가 살아 숨 쉬는 마을인 화북동에 가면 역사서가 따라 온다. 가는 곳마다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을 읽으면 역사서를 읽는 기분에 젖는다

삼사석(三射石)에서 삼을라를 보다

제주도 신화에 따르면, 삼성혈에서 솟아난 삼신인은 벽랑국의 세 공주를 부인으로 맞은 후 한라산 북쪽 기슭 쌀손장오리에서 화살을 쏘아 거주할 땅을 정했다. 그때 화살이 꽂혔던 돌을 삼사석(三射石) 혹은 시사석(矢射石)이라 하며, 그곳을 살쏜디왓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삼을라가 당긴 화살이 꽂힌 곳을 각각 일도리, 이도리, 삼도리라 전한다

삼을라는 각자 새로운 터전에 움집을 지어 오곡 씨앗을 뿌리고 목축을 기르니 나날이 곡식이 가득하고 자손들이 번창, 한곳에 정착해 살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삼성신화를 들은 김정 목사가 1735년 관련 유적을 돌아보고 나서 삼사석비(제주도기념물 제4)를 세우게 했다. 다음은 삼양과 화북의 경계지역에 있는 삼사석비 안내판의 내용이다.

화북동에 있는 삼사석과 삼사석비.
화북동에 있는 삼사석과 삼사석비.

삼사석은 탐라국의 시조인 삼신인(三神人·고을나, 양을나, 부을나)이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부인으로 맞은 후 거주할 땅을 정하기 위해 화살을 쏘았을 때 그 화살이 꽂혔던 돌을 말한다. 1735(영조 11) 김정이 제주목사로 와 삼성신화(三性神話)를 듣고, 관련 유적을 돌아봐 삼사석비(三射石碑)를 세우게 했다.

비의 크기는 높이 113, 너비 43, 두께 183이고 비 옆면 좌우에는 옛날 모흥혈에서 활을 쏘아 맞은 돌이 남아 있으니, 신인들의 기이한 자취는 오랜 세월 서로 비추리라(毛興穴古 矢射石留神 人異蹟交 暎千秋·모흥혈고 시사석류신 인이적교 영천추)’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庚午三月七日改竪(경오37일개수)’라고 새겨졌다

1813(순조 13) 양종창, 고익보, 부찬빈 등이 석실을 만들어 삼사석을 보존했다. 석실의 크기는 높이 149, 앞뒤 너비 101, 옆 좌우 너비 67이고 석실 좌우 기둥 판석에는 삼신 유적이 세월이 오래돼 남은 것을 거두어 이제 수습하여 석실에 합하였다.(三神遺蹟 歲久殘斂 今焉補葺 加以石室·삼신유적 세구잔렴 금언보즙 가이석실)’라는 뜻의 글이 한문으로 새겨져 있다

현재 이곳의 삼사석비는 1930년 고한룡, 고대길, 고영은 등이 다시 고쳐 만들었으며, 원래의 삼사석비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돼 현재 삼성혈 경내에 세워져 있다.

거로마을 능동산 방묘의 주인공은 탐라국의 성주인가

제주도 기념물 제60-4(주소: 화북23401번지)인 능동산 방묘는 번영로와 인접한 거로마을 진입로에서 동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동산에 있다

거로마을 능동산 방묘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제주도 유력 계층이 조성했다고 전해지는 무덤 양식이다. 화북동 거로마을 내 해발 80~85m, 속칭 능동산에 위치하고 있어서 능동산 방묘로 불린다. 묘의 모습은 북향으로 목관을 안치하는 직사각형 석곽목관묘의 형태이다.

이 묘의 주인공은 제주의 마지막 성주인 고봉례(?~1411)와 그의 부인인 문씨를 합장한 쌍묘로 알려져 있다. 제주의 역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성주와 왕자는 탐라왕국을 다스렸던 우두머리 벼슬의 칭호이다. 성주(星主)는 탐라왕의 다른 칭호이고, 왕자는 왕의 아들이 아닌 탐라 최고위직 두 번째의 벼슬이다

1392년 조선 개국 당시 제주의 성주는 고봉례이고 왕자는 문충세이다. 1402년 성주와 왕자는 좌도지관과 우도지관으로 격하됐다가 세종대에 와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능동산 방묘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고봉례의 아버지는 제주 성주였던 고신걸이다. 고신걸은 왕자 문신보와 함께 1374년 목호의 난과 1375년 차현우의 난 그리고 1376년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앞장섰던 인물로, 고려 조정에 의해 호조전서가 특별히 내려지기도 했다

능동산 방묘가 있는 이곳에서는 상감청자편, 조선 초기 백사청자 등 10편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능동산의 묘의 유형과 출토된 유물을 분석한 결과, 고씨세보상에 전해오는 고봉례의 묘 위치와 사망 연대인 1411년이 일치한다고 알려졌다.

능동산 방묘는 조선 중기 이후 나타난 원형 분묘보다 앞선 제주의 무덤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도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이런 형식의 방묘로는 가시리의 청주한씨 제주 입도조인 한천의 묘와 애월과 김녕에 있는 삼별초 당시 고려의 김수 장군과 그의 후손 묘 등이 있다

()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구릉처럼 동산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임금 등 높은 관직의 무덤을 의미한다

1954년 담수계에 의해 발행된 증보탐라지의 고적 항목에서는 능동산은 제주성 동남쪽 10리에 있다. 고총 하나가 완연하다. 민간에서 전하길 왕자묘라 한다(陵東山 在州東南十里 古冢一丘宛然 諺傳王子墓)’라는 기록도 전한다. 다음은 능동산 안내판 옆 표지석의 내용이다

이곳은 탐라성주 고봉례의 묘로 추정되는 고분으로 제주시의 의뢰를 받아 1996126일부터 19961225일까지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원상복구 한 곳임. 1998. 5. 2. 제주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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