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일본 국가 제창 거부·동포 교육 힘쓴 청년 운동가
(135) 일본 국가 제창 거부·동포 교육 힘쓴 청년 운동가
  • 제주일보
  • 승인 2020.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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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현, 훈장 항일운동 펼쳐
 김종호, 조천 만세운동 참여
 김종훈, 중문 대포 출신 훈장
 김좌근, 계성사 창건 추진해
 김주경, 제주농업학교 졸업
 김주삼, 오사카서 야학 활동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제주항일기념관 제2전시실 모습. 제주항일기념관은 제주도에서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열들의 희생정신과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제주항일기념관 제공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제주항일기념관 제2전시실 모습. 제주항일기념관은 제주도에서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열들의 희생정신과 자주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제주항일기념관 제공>

김종현金鍾炫1875(고종12)~1916(일제강점기), 훈장 항일활동. 한학자. 본관 경주. 제주 성내에서 태어나 처음 이름은 김철희(金喆熙) 또는 김용한(金容漢), 자는 중명(重明) 또는 문평(文平)이라 하고 호는 스스로 묵농(墨農)이라 했다

영운(瀛雲) 김계두(金桂斗)의 문하생이다. 김계두는 본시 경남 하동 사람인데 구한말 본도로 건너와 훈학에 종사한 한학자였다. 묵농의 증조부는 문행(文行)으로 널리 알려진 무암(霧岩) 김석우(金錫友)였다

이를 이었는지 묵농도 어릴 때부터 재주가 넘쳐흘렀다. 장성해서 경사자집을 모두 뚫어 보았으며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성명(性命)의 심오함과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터득했다

1905년 이후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졌음을 감지하게 됐다. 그는 서당 교육을 통해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쳐 나갈 결심을 갖게 됐다. 이는 면암의 구국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전략이었다

비록 반봉건이란 한계점을 극복하지 못하면서도 향촌 사회의 선비로서 곧은 절개를 지켰다. 1907년 제2차 의병 전쟁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듣고 실망도 컸다

1910년 국망의 치욕에 이를 갈며 탐라지를 서술했다. 날이 갈수록 일본 세력이 들어와 날뛰는 꼴을 보고 통음(痛飮)으로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

그의 재주와 문장을 아끼던 문인들은 그의 넋이 망가짐을 걱정했으나 말릴 수 없었다. 김종현은 사부(詞賦)에 능했고 병려문(倂儷文)에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고 사양함이 없었다. 성품도 호방해 거침없이 말을 했다

그가 성산면 시흥리의 역돌(力乭)서당에서 42세로 타계하자 문우들이 몹시 슬퍼했다

묵농의 주옥같은 시문은 산실(散失)돼 오직 저서 탐라지가 전해진다고 심재(心齋)는 언급했으나 아직껏 책을 보았다는 이가 없다

6세 때에 부친을 잃은 외아들 김기범(金基範)19282월 제주보통학교(현 제북교)에서 일어난 동맹휴학의 주동자로 지목받아 퇴학을 당했다

김기범은 그 후 샛별소년단 운동을 주도하면서 민족적인 저항 운동을 전개하더니 일본으로 건너가 민족해방 운동에 앞장섰다

김종현의 시 呈瀛雲先生 영운선생께 올림’=胸中抱得三千卷가슴속에 3천권의 책을 얻어 품고 /海上淹留二十年머무른 이름 20년 세월 /老去鄕山頻入夢바다 속에 늘그막엔 고향 꿈 자주 꾸셨겠는데! /晩來衣鉢愧無傳의발을 전할 곳 없음이 부끄럽습니다

哭挽陶軒先生 의청선생을 곡함’=滄海東頭屋數椽푸른 바다 동쪽 언던 서너 칸 집에 /究經白首送天年늙도록 경서를 연구하여 생애를 마치었네! /他時若撰瀛洲誌후일에 만약 영주지를 새로 편찬하였다면 /此老先登隱逸篇이 노인을 맨 먼저 은일편에 실을 것을

김종호金宗鎬1902(광무6)~?,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 항일활동. 산북 조천리에서 출생했다. 1919321일부터 324일까지에 걸쳐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이 일로 체포돼 동년 42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항소하지 않았다

이때의 항일운동으로 1심에 기소된 자는 모두 29명이다

김종훈金鍾勛1877~1949(분단시대), 한문 훈장. 원 중문면 대포리 -에서 태어났다. 호는 우포(愚浦), 특히 민족종교 보천교(普天敎)를 믿었으며 수제자(首弟子)는 동향의 수산(水山) 강상백(姜祥伯)을 들 수 있다

제자들이 세운 추모비가 있다

김종훈의 시 初月 초생달’=盈缺幾千秋몇 천년을 둥구랬다가 이즈러졌는지 /今宵片影浮오늘밤도 조각달 그림자 떴구나! /猶新天下目온 세상 사람들의 눈을 새롭게 하고 /遙掛海西頭멀리 서쪽바다 머리에 걸려서 /魄社隨時變때에 따라 주위 광채 죽었다가도 /光蘇宿雨收비 개이면 그 빛이 다시 되살아난다. /循環弦望理초하루와 보름에 돌아가는 이치는 /難用淺心求얕은 마음으로는 알아내기 어려워라.

김좌근金佐根1797(정조21)~1869(고종6). 문신, 세도정치가. 시호는 충익(忠翼),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 본관은 안동. 영의정 김창집(金昌集)5대손. 영안부원군 조순(祖淳)의 아들. 순조(純祖) 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동생

1838(헌종4)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했다. 대원군이 집정하자 실록 총재관이 돼 철종실록을 편찬하고 영삼군부사를 지냈다

제주향교의 계성사(啓聖祠) 창건 윤허를 얻어냈다. 시호는 충익(忠翼) 제주에 영당(影堂)이 있었다.

김주삼金柱三1912(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성심야학(誠心夜學) 항일활동. 본관은 김해. 김기문(金基文)의 아들로 산북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향리 청년들과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던 중 193111일 조천교 학동들이 신년 축하식에서 일본 국가(國歌) 및 칙어봉답가(勅語奉答歌)를 제창(齊唱)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자 그 배후 인물로 지목돼 체포됐다

그는 이 일이 있은 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서 직공으로 일하면서 이봉춘(李奉春·우도)이 개설한 성심야학(誠心夜學)의 교사가 됐다

이 야학교는 이봉춘(李奉春·우도)1934년부터 오사카 동성구(東成區) 저사야중(猪飼野中)의 가정집에 개설한 학습소이다. 빈곤한 고향 자제들을 모아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독립국가 건설과 민족의식 고양을 도모했다.

이봉춘, 김주삼(金柱三·조천), 고갑팽(高甲彭·삼도) 등이 교사로서 활동, 20~30명의 한인 학생들에게 표면적으로 국어·산수 등의 일반 교육을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실상은 조선독립가(獨立歌)를 만들어 부르게 하고 한국역사·한글·한국지리 교육을 통해 조국과 민족을 예찬하는 데 힘써 독립국가 건설을 역설했다

이와 같은 민족의식 교육은 이후 장소를 11개소로 전전하며 핵심 인물들이 체포될 때까지 계속됐다

194211월에 설립자 이봉춘, 교사 김성종(구좌), 고갑팽 등이 구속되고 194311월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이봉춘에게는 4년을, 김성종에게는 징역 2년이 선고됐다

김주삼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풀려났으며 이후 일본에서 영주(永住)했다. 당시 이 야학교의 조선독립가는 다음과 같다

동포여 우리는 조선의 형제자매다. /그렇다. 그렇다. 그렇고 말고, /굶주림과 헐벗음으로 울부짖는 우리는 /가련한 조선의 형제자매다. /밥과 옷을 달라고 외치며 싸우며 /뛰어다니는 우리들의 나날이지만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힘차게 싸운다. /산천이 바뀌고 또 바뀔지라도 /우리들의 마음은 변치 않으리.” 

김주경金湊京생몰년 미상, 애월읍 곽지리 출신. 제주농업학교 졸업(28). 일본 요시노임업학교 5년 졸업. 철도청 목포순천보선계장, 순천여자고등학교 주임교사, 철도청 계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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