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뻗어 나온 마을…고려 원종 때 최초 기록
사찰에서 뻗어 나온 마을…고려 원종 때 최초 기록
  • 제주신보
  • 승인 202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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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부록·거로마을과 소림사
절동산에 있던 소림사서
화북동 설촌 시작 추정돼
인목대비 친모 유배 역사
메마르지 않는 샘 ‘절샘’
제주시 화북동 소재 별도봉에서 바라본 거로마을 전경. 부록마을 아래쪽 지경으로 사람들이 모이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영창대군의 외할머니이자 인목대비의 친모인 노씨부인이 유배와 살기도 했다. 출처 : 거로·부록마을지
제주시 화북동 소재 별도봉에서 바라본 거로마을 전경. 부록마을 아래쪽 지경으로 사람들이 모이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영창대군의 외할머니이자 인목대비의 친모인 노씨부인이 유배와 살기도 했다. <출처 : 거로·부록마을지>

화북동은 제주시 동북부 지역의 중심 마을로 동쪽으로는 삼양동, 서쪽으로는 건입동·일도2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1270년 고려 원종 11년 경오 11월에 삼별초군이 탐라를 정벌하려 할 때 동제원(東濟院)에서 관군과 일전(一戰)을 하였다는 기록이 문헌상으로 알려진 화북경(禾北境)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며 1300(고려 충렬왕 6) 제주에 10현을 설치할 때 제주를 동서로 구분, 이도(二道)를 설치하면서 서도에 처음 별도현이 기록됐다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화북동의 부록마을과 거로마을의 유래, 그리고 화북동의 발원지인 소림사와 절샘에 대해 살펴본다.

화북동 설촌은 부록·거로 마을에서부터

건입동 지역에 속하는 사라봉과 화북동 지역인 별도봉을 바라보며 고우니모루를 넘어서면 만나는 마을이 화북동이다. 두 갈래의 대로는 모두 화북동을 지나고 있다. 한 갈래는 바다쪽 일주도로이고, 또 한 갈래는 중산간 방향의 번영로이다

화북동의 발원지는 바다 쪽이 아닌 번영로의 부록마을 부근이라 전한다. 속칭 절동산으로 불리는 절새미(寺泉)와 절터(寺址)에서 화북동의 설촌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화북 사람들은 이곳을 부르기라 부르고 있다. 부르기의 어원을 찾는 일은 곧 화북동의 설촌 유래를 찾는 일이다

불우(佛宇)는 소림사라는 사찰을 의미한다. ()는 터, 기초, 기본의 의미이다. 불우기에서 음운 변형된 부르기는 사찰과 관련된 마을을 의미하는 말이다. 고려 초중엽에 절동산에 세워진 소림사 부근에 승려 가족들과 절과 관련한 사람들이 몰려와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을 것이다.

탐라순력도 한라장촉에 표기된 거로와 부록.
탐라순력도 한라장촉에 표기된 거로와 부록.

탐라순력도 등 고지도에는 부르기를 한문으로 부록(夫彔), 부록촌(夫彔村), 부록리(夫彔里)로 표기했으나, 19세기부터는 부유하고 복이 있는 마을의 의미를 담고 있는 부록(富祿)으로 쓰이고 있다

다음은 영창대군의 외할머니이자 인목대비의 친모인 노씨부인이 1618년과 1623년 사이 유배와 살기도 했던 거로마을에 대한 소개이다

아주 오래전에 형성된 부록마을 아래쪽 지경으로 사람들이 모여 이룬 마을이 거로마을이다. 처음의 마을 이름은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큰 길이 있는 마을의 의미를 담아 거로(巨路)로 쓰였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또 다른 의미가 깃든 거로(居老)가 쓰이기도 했는데, 사연은 다음과 같다

17세기 초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에 온 한 사신(使臣)이 동제원(東濟院)에서 쉬고 있었다. 주변이 명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 이름을 묻는 사신에게, 주민들은 사통팔달의 길이 있는 마을인 거로(巨路)라고 알려주었다. 마침 남쪽에 노인성이 비추는 것을 본 사신이 거로(居老)로 불리면 사람들이 장수하고 마을이 번성하겠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그 후 이곳 사람들은 거로(巨路)를 거로(居老)로 바뀌어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탐라순력 등 고지도에는 거로(居老) 또는 거로촌(居老村)으로 표기돼 있다. 다시 또 거로마을의 한자가 바뀌는데, 18세기 말부터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학덕이 높은 원로들이 사는 마을의 의미를 담고 있는 거로(巨老)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다음은 화북에 대한 소개이다. 거로 아래에 포구가 형성되면서 마을 이름을 벨돗개마을, 별랑촌, 별도포리, 별도(別都), 별도촌, 별도리 등으로 불려오다가, 17세기 중후반부터 화북진성에서 보듯 화북이라 불려오고 있다. 20세기 초반에 한때 공북(拱北)라 불리기도 했다

제주목은 탐라도성(耽羅都城)이 있던 대촌(제주시)을 중심으로, 성 밖 첫째 마을로 동쪽에는 별도(別都), 서쪽에는 외도(外都) 마을을 설치했던 셈이다

화북동 발원지 소림사(小林寺절샘(寺泉

화북동 발원지로 추정되는 ‘절동산’터.
화북동 발원지로 추정되는 ‘절동산’터.

소림사는 오래전 절동산이라 불리는,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있던 절이다. 지금의 번영로가 지나가는 연변의 마을들인 거로(巨老)와 부록(富祿) 사이에 있던 소림사는 고려 전기(前期)에 창건됐다가 1555년에 발생한 을묘왜변 시 왜구에 의한 대화재로 소실됐다고 한다.

1481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소림사 절은 제주 동남쪽 10(州東南十里)’, 1954년 담수계가 발행한 증보탐라지에도 제주읍 동남 4에 있으나 금폐(今廢)’됐다고 기록돼 있다

소림사 동쪽 지경에 있던 절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932년 김두봉이 편찬한 제주실기에는 사천재거노촌남(寺泉在巨老村南·절샘은 거로마을 남쪽에 있다)’이라 적혀있고, 증보탐라지에는 절샘인 사천(寺泉)이 제주읍 화북리 거로동에 하다라고 기록돼 있다

절샘은 1989년 번영로 개설공사 때 매몰됐다고 한다. 이런 내용이 담긴 안내 글이 번영로에서 화북동 거로마을 진입로인 굴다리 동쪽에 부착돼 있다.

또한 소림사터 남쪽에는 소림원이라는 과원도 있었다 전한다. 이원진이 1653년에 편찬한 탐라지에는 소림원이 소림사 남쪽에 있다(小林園在小林寺南)’라고, 소림원에는 또한 유자 201, 비자나무 72, 옻나무 54, 치자나무 16, 닥나무 110주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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