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일제 부정 폭로 대가로 모진 고문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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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광, 고려 반역 일당 처단
 김중배, 제주군수 도임·면직
 김중업, 제주대 본관 설계자
 김중옥, 정조2년 대정현감
 김중채, 대정현감 재임·파직
 김중태, 숙종33년 제주판관
 김중현, 1993년 애족장 수훈
1938년 11월 13일 찍은 서신부(徐神父·Sweeney, Augustine) 송별기념 사진. 김중현은 천주교 신부였던 서신부, 손신부(孫神父·Dawson, Patrick), 나신부(羅神父·Ryan, Thomas.D.) 등과 항일운동을 펼쳤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38년 11월 13일 찍은 서신부(徐神父·Sweeney, Augustine) 송별기념 사진. 김중현은 천주교 신부였던 서신부, 손신부(孫神父·Dawson, Patrick), 나신부(羅神父·Ryan, Thomas.D.) 등과 항일운동을 펼쳤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중광金仲光생몰년 미상, 고려 우왕 때 탐라의 만호

제주도에 머문 원나라의 합적(哈赤), 강백안(姜伯顔) 등이 고려에 반역적인 행동을 했다. 그는 강백안 등 일당 13명을 죽이고 일당의 가족들을 전라도의 광주와 나주 등지로 유배시켰다

1384(우왕10) 제주만호 김중광이 말 104필을 고려 조정에 바치니 우왕은 양마 39필을 뽑아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궁녀와 환관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중배金重培생몰년 미상, 제주군수.

1905(광무9) 115일 군수로 발령받아 홍우순(洪友淳)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906816일 면직됐다.

군수 김중배의 면직 이유는 그의 행정 실적 평가가 최하위에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실은 제주군수 김중배의 치적 내용을 보면 본시 해망(駭妄)하고 일을 많이 패려(悖戾)하여 오히려 고치지 아니하니 이 어찌 백성들을 죄줄 수 있으랴! 치적이 최하위이다라고 했

김중업이 설계한 제주대학교 본관.
김중업이 설계한 제주대학교 본관.

김중업金重業1922(일제강점기)~1988, 건축가, 제주대학 용담(龍潭)캠퍼스 본관 설계자, 호 여천(如泉), 본관은 연안.

평양에서 강동·중화·선천군수를 지낸 김영필(金永弼)의 아들이다

1963년 제주대학 문종철(文鍾哲·삼도) 학장의 강한 의욕에 의해, 이듬해 김중업은 쾌심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대학 본관을 설계했다

그는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65년 주한프랑스대사관 설계로 프랑스정부로부터 국가공로훈장과 슈발리에(Chevalier) 칭호, 1985년 산업포장(건설 유공부문) 등을 받았다

호화선 같기도 하고 비행기를 닮았다고 하는 이 건축은 젊은이들이 높고 깊은 꿈을 길러 주려고 애써 빚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21세기의 건축이라 일컬어질 만큼 해외에서 더욱 알려져 있다

10년 만에 이 건물을 찾은 그는 문종철이란 멋쟁이에게 끌려 지은 작품인데 건축은 폐허 상태이며 문종철도 저승에 가고 제주는 공허하게끔 느껴진다. 이 작품은 건축 교과서에 21세기를 예시하는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 시니컬하기만 하다. 제주의 역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기념관으로 살렸으면 좋으련만 우리가 우리 것을 아끼지 못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회고했다

김중옥金重玉1735(영조11)~1780(정조4), 문신, 대정현감. 평안도 정주 출생, 자 대옥(大玉), 본관은 안동

1755(영조31) 문과 정시에서 병과로 합격, 1778(정조2) 8월 김도혁(金道爀)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802월에 재임 중 사망했다.

김중채金重采생몰년 미상, 대정현감

1737(영조13) 9, 김상삼(金象三)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3811월에 파직됐다.

김중태金重泰1663(현종4)~1735(영조11), 문신, 제주판관, 본관 상산, 자는 대래(大來), 호 수졸헌(守拙軒).

전라도 함평군에서 중추부사 김재현(金在鉉)의 손자로, 김일정(金一精)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학(四學) 유생으로 직부를 통해 뽑혔다. 1690(숙종16) 문과에 급제, 1692년에 흥덕현감으로 재임 시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 후 고성(固城)현령이 돼 재임 당시의 치적을 높이 평가해 송덕비를 세웠다

내직으로 예조정랑을 거쳐 감역관(監役官)을 지냈으며 민비(閔妃) 복위의 상소를 하고,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귀향해 후생 교화와 시문을 벗 삼아 지내다 생을 마쳤다. 벼슬은 찰방에 이르렀다.

 1707(숙종33) 4, 정회(鄭會)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70910월에 떠났다. 김중태는 1712(숙종38) 9월 전라도 흥덕현감(興德縣監)으로 부임해 이듬해 6월에 그만둔 바 있었다

김중현金仲鉉1914(일제강점기)~1974, 제주도 천주교 신도 및 신부와 항일 활동. 본관 김해

김영환(金永煥)의 아들로 산북 삼도리 제주성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며 제주성당에 소속된 신자이다. 경성사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귀향해 미싱(재봉틀) 상점을 경영했다

정부에서는 1993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당시 항일활동은 천주교 신부였던 손신부(孫神父·Dawson, Patrick)와 서신부(徐神父·Sweeney, Augustine) 그리고 나신부(羅神父·Ryan, Thomas.D.) 등 세 사람이 주도하고 있었다

1939년부터 제주 천주교회에서 신도들에게 신문과 라디오 방송이 항상 일본의 전과를 과대하게 보도하는데 불만을 품고 불공정한 보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19397월경부터 제주성당(남문통 소재)의 아일랜드인 선교사 손신부(孫神父·본명 다우슨 패드릭)에게 수차에 걸쳐, 대정(大靜)면 모슬포의 해군 비행장에는 대규모의 격납고(格納庫)가 설치돼 30대가량의 비행기가 계류 중이라고 알려 주었다

또 다수 군인이 주둔하며 해상에도 항상 수척의 군함이 정박하고 있다는 사실과 모슬포 비행장에서 발진한 일본 해군기가 중국의 상해를 폭격하다가 중국군의 포격을 받아 퇴각하던 중 추락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또한 194012월부터 1941년 여름에 걸쳐 손신부 및 신도 허봉학((許鳳鶴), 하성구(河成九) 등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수차례에 걸쳐 일본의 신문들은 독·(·)전쟁에서 독일이 대승하고 있다고 발표하나 실은 허위 보도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이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말했다.

정감록(鄭鑑錄)의 예언에 따르면 중·일전쟁은 일본의 패전으로 끝날 것이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

이 무렵 일제는 제주도를 중국에 대한 도양(渡洋)폭격의 발진 기지로 만들면서 도내 반일(反日) 세력을 색출 제거하고자 했다. 우선 적성국인 아일랜드인 선교사들과 천주교회 조직을 탄압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군사 기밀 유출 및 유언비어로 194110월에 손 신부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고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4210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국방보안법 및 군기(軍機)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또 소위 육군 형법·해군 형법 위반으로 금고 10월이 병합돼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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