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승전지…2년 항쟁 역사가 시작되다
삼별초 승전지…2년 항쟁 역사가 시작되다
  • 제주신보
  • 승인 20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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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동제원과 화북진지
길손들 위한 숙소였던 동제원
고려관군·삼별초군의 격전지
왜구 방어 위해 화북진성 축조
탐라순력도에 군사 모습 담겨
화북진성의 모습. 화북 바닷가에 있는 수전소에 왜구로부터 제주성을 방어할 성을 쌓을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돼 1678년(숙종 4) 최관 제주목사가 진성을 축조했다. 동서 120m, 남북 75m, 둘레 187m, 높이 3.3m의 타원형 형태였다. 사진=전광희 제공
화북진성의 모습. 화북 바닷가에 있는 수전소에 왜구로부터 제주성을 방어할 성을 쌓을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돼 1678년(숙종 4) 최관 제주목사가 진성을 축조했다. 동서 120m, 남북 75m, 둘레 187m, 높이 3.3m의 타원형 형태였다. <사진=전광희 제공>

거로마을 입구에 있었던 동제원은 삼별초군과 고려 관군이 치열한 결전을 치른 격전지이다. ()은 조선시대 관원들이 출타 중에 묵거나 쉬어가는 역참(驛站)과 같은 곳으로 제주에서는 김녕원, 중문원, 의귀원, 원동 등 10여 곳에 있었다.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삼별초와 고려군 교전이 치열했던 동제원 전적 터를 따라가 보고 제주도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군사적 요지 화북진지를 들여다본다.

삼별초와 동제원(東濟院) 전적(戰蹟)

지금의 화북천을 지나 비석거리와 화북포구로 가는 길목인 거로마을 입구에 있었던 동제원을 속칭 동주원, 동지원이라고 불렀다

1439년 제주도안무사인 한승순이 왜적을 제어하는 방법은 마병만 같지 못한데 본주에는 참(: 역과 원의 중간 숙소)과 역()을 설치하게 해달라고 하니 그대로 시행됐다는 기록이 있다

제주에는 제주목과 정의현을 잇는 중간지점에 동원을, 제주목과 대정현을 잇는 중간지점에는 서원을, 대정현과 서귀진 사이에는 중문원 등이 있었다

동제원 전적 터 안내표석.
동제원 전적 터 안내표석.

동제원은 제주성과 조천진성 사이를 오가는 길손들을 위해 마련된 숙소였다. 동제원 동쪽의 송담천(松淡川: 지금의 삼수천) 일대는 고려 관군과 삼별초군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즉위 과정에서 원나라의 도움을 받은 고려 원종은 1270년 천도해 있던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고 환도를 반대하는 삼별초를 해산했다. 그러자 배중손 등은 삼별초군과 반몽(反蒙)세력을 규합하고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해 정부 조직까지 갖추고는 15000여 명을 이끌고 남하, 진도에 용장성을 쌓고 항전했다

이에 고려 관군은 진도를 공격하는 한편, 삼별초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12709월 고여림 장군과 김수 영광부사 등을 제주도에 보내 환해장성을 쌓고 지키도록 했다. 삼별초 이문경 장군은 명월포로 상륙, 이곳 동제원에 진을 치고 동제원 동쪽에 있는 송담천 일대에서 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제주에 삼별초군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다음은 오현고등학교 정문에서 동쪽으로 비석거리 가는 골목 직전에 있는 동제원 전투에 관련된 표지석 내용이다.

동제원(東濟院) 전적지(戰迹地): 삼별초와 고려 관군이 결전을 벌인 격전지. 1270(원종 11) 명월포로 상륙해 온 이문경 장군의 삼별초를 맞아 고려 관군은 이 동제원에 주진지를 구축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고여림 장군과 김수 영광부사 등이 전사하고 관군은 전멸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삼별초는 제주도를 점거하고 2년여에 걸쳐 여원연합군과 항쟁을 벌이게 된다.’

그 후 1271년 삼별초의 왕 승화후 온과 대장 배중손이 사망하는 등 진도에 있는 삼별초 정부가 붕괴되자 김통정 장군은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에 상륙, 애월읍 고성리에 토성을 쌓고 항전에 나섰다. 관군은 삼별초를 회유했으나 삼별초군은 사신을 죽이는 등 강력히 저항했다.

12731월 원의 세조가 탐라를 정벌하도록 명함에 따라, 3월에 몽고군 6000명과 김방경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 6000명 등 12000여 여몽연합군이 3군으로 나뉘어 명월포·귀일포·함덕포로 상륙했다. 3일간의 접전 끝에 삼별초가 항복하고, 김통정 장군의 자결로 삼별초의 항쟁은 막을 내린다.

화북진지와 탐라순력도 화북성조

제주도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된 화북진지는 조선시대 제주도의 군사적 방어성곽인 화북진성이 설치돼 있던 자리다. 조선시대 제주의 방어시설로는 3925봉수대38연대가 있었다. 9진중 하나인 화북진은 1678년 제주목사 최관에 의해 구축됐다

동서로 2문이 있었고 1699년 남지훈 목사가 객사인 환풍정(喚風亭)을 지었다. 이후 북성 위에 망양정(望洋亭)이 들어섰다

군사요충지인 화북진성에는 조방장과 치총 2인 방군 92인 사후선 1척 등을 두었다. 화북진성이 들어서기 이전의 화북포는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수전소로 방어의 요새였다

1653년에 편찬된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화북포에는 판옥전선이 중부, 좌부, 우부에 각각 1척씩 있다. 또한 비상 양곡이 6, 격군이 180, 사포가 87명 있다고 적혀있다

왜구로부터 제주성을 방어하기 위해 화북 바닷가에 있는 수전소에 성을 쌓을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제기돼 1678(숙종 4)에 최관 제주목사가 진성을 축조했다. 화북진성은 동서 120m, 남북 75m, 둘레 187m, 높이 3.3m의 타원형 형태였다

축성 당시에는 북쪽의 성곽은 해안과 접해 있었다. 화북진성의 축조 방식은 현무암을 거칠게 다듬어 허튼층쌓기로 협축에 잡석을 채웠다.

 화북진성에 대한 유물·유적 조사에서는 관아시설에서 사용됐던 기와 및 백자 등 생활용기가 출토됐다. 성곽의 형태가 대부분 잘 보존돼 있어 조선시대 제주도 관방시설 학술연구에서 귀중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926년 화북초등학교가 화북진성 안에서 사립으로 개교했는데, 당시 진성이 학교의 울타리로 이용되면서 부분적인 보수가 이뤄졌다. 진성의 북쪽은 폭 5m 도로를 사이에 두고 화북포구와 연결돼 있는데, 이는 바다를 매립해 도로를 개설한 것이다

탐라순력도 화북성조.
탐라순력도 화북성조.

탐라순력도 41화폭 중 하나인 화북성조(禾北城操)는 화북진성에서 군사를 조련하고 훈련을 점검하는 모습이다. 1702(숙종 28) 1029일에 실시했다. 화북진에 소속된 성정군(城丁軍)의 군사훈련 모습을 그렸다

당시 화북진의 조방장은 이희지(李喜枝)이며, 성정군의 규모는 172명이다. 군대의 점검과 아울러 군기의 수효도 일일이 확인했음을 알 수 있다.화북성이 있는 진의 자세한 지형과 성의 위치, 그리고 성내의 건물 배치뿐만 아니라 민가의 위치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성의 좌측에는 화북진에 소속된 별도연대(別刀煙臺)의 위치가 표시돼 있다. 별도포 안에는 몇 척의 배가 정박돼 있는데, 당시 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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