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접시꽃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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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뒤뜰에 하얀 접시꽃이 피었다. 깔끔하고 소박해서 조심스레 눈길을 준다. 어이해 하얗게 피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를 알 수가 없다.

3년 전 봄에 빨간 접시꽃을 앞마당에 심었었다. 홑꽃과 겹꽃 두 종류였다. 6월이 되자 장대같이 자란 꽃대에 빨간 등을 내걸면서 정열을 뿜어냈다. 이태 동안 내 마음을 고혹했다. 가을이 되자 꽃대를 잘랐더니, 뿌리 근처에서 잎이 돋아났다. 내 딴엔 물을 주며 관심을 쏟느라 한 게 탈이었을까, 지난해 새로 돋은 잎들이 시들며 내 곁을 떠나버렸다. 서운했다.

올봄에 뒤란에서 접시꽃 싹이 돋아났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꽃대를 버린 곳이라, 씨에서 발아한 모양이다. 사이좋은 형제들처럼 세 줄기가 힘차게 자라더니 잎 마디에 봉오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홑꽃일까 아니면 겹꽃일까. 봉오릴 벌려 보고픈 궁금증이 일었다. 그런데 하얀 홑꽃을 피운 것이다. 근처엔 흰 접시꽃이 없어 씨앗이 바람 타고 이주해 온 것도 아닐 텐데.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란 말, 하얀 접시꽃에서 읽는다.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뉘 알겠는가. 야구 경기에서 9회 말 한 방의 홈런으로 역전승을 거둔다면, 이보다 호쾌한 것이 또 있을까. 우리의 삶에서도 때론 회심의 미소를 지을 일이다. 설령 삶에 지쳐 풀썩 주저앉을지라도, 이 말을 떠올리면 앙다물고 일어설 수 있을 테니까.

세월이 쌓이는 탓인지 인생을 놀이처럼 여길 때가 많아진다. 늙어 갈수록 육체는 피폐해지고 마음도 서러워진다. 나날을 살살 달랠 수밖에 없다.

늦깎이로 글쓰기와 뒹구는 건 내게 행운이다. 이렇다 할 시나 수필 한 작품 쓰지 못해 자신을 타박하기도 하지만, 깜냥대로 쓰는 거지 하면 마음 편하다. 게다가 별로 돈 들이지 않고 무료하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

누구라도 그림이나 서예, 악기 연주나 글쓰기 등에 발을 디딘다면 노년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젊어서 시작했다면 축복일 테고. 공부는 노력, 예능은 타고난 재능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잭 햄부리크 교수에 의하면 음악 분야에서는 79%의 선천적 재능과 21%의 노력, 스포츠 분야는 82%의 재능과 18%의 노력 그리고 공부에서는 96%의 재능과 4%의 노력이 성패를 판가름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못 믿겠다면 정주영의 어록 하나를 떠올리면 될 듯하다. “해보기나 했어?” 그래, 해보기도 전에 예단하며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음치라고 낙인찍지 말고 유행가 몇 곡 익혔더라면 노래방이 진저리치는 곳은 아니었을 텐데.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신이 주신 능력을 손 한 번 잡지 못하고 헤어진다면 송구한 일이다.

제주시청 도로행정과에서는 시詩와 함께하는 인문학 버스정류장 조성을 위해 작품을 공모하여 30편을 선정했다고 한다. 큰 박수를 보낸다. 한두 달 후면 정류소 표정이 달라지지 않을까. 사람들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시심에 젖으며 고된 삶을 위로하고 주변을 포근히 바라볼 것이다. 또 누군가는 시의 씨앗을 받아 갈는지도.

시는 문학의 정수요 영혼의 등불이라고도 한다. 인간과 세상을 심미적으로 바라볼 때 세상의 그늘은 줄어들 것이다.

날씨가 무더워지고 마스크로 호흡이 힘겹지만, 우리 살았던 오늘이 아름답게 기억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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