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싱그러움 차오르는 곳
음악에 취하고 노래에 취해 본다
상처와 사랑의 또 다른 이름, 꽃
인연의 시작과 끝은 어디쯤일까. 사람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자신를 향한다. 시작을 꿈꾸는 것도 이별을 고하는 것도 이기에서 비롯될 뿐. 견고했던 사랑도 봄날의 꽃잎들처럼 어느 한 순간 피었다가 찰나에 저물기 마련이다. 늦은 봄날, 내 기억 속에서 먼 길 떠난 너를 다시 불러본다. 너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계절마저 길을 잃고 헤매는데 삶이라고 다를까. 갑작스러운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세상은 어지럽고 갈수록 상처 입은 영혼들이 쏟아져 나온다. 꽃이 펴도 꽃이 되지 못하는 이 봄. 그래, 지금은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순간. 작지만 깊은 위안을 만나러 길을 떠난다.
앞다투며 피어난 봄꽃들이 먼저 반긴다. 이름도 푸릇푸릇한 ‘초원의 집’(박창언 대표)이다. 곱게 핀 야생화를 혼자 보기 아까워 바람난장 식구들을 초대했다고 한다. 초입부터 마당 안까지 초록의 싱그러움이 차오른다. 부유물처럼 떠다니던 마음의 파문이 금세 차분해진다.
대체 주인은 어떤 마음으로 이 많은 수국을 길러냈을까. 수국은 하루에 8~9시간 이상 물을 주며 키워야 해서 ‘물국’이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고 한다. 말 그대로 사랑과 정성이다. 무릇 삶도 자연도 서로 기대지 않고 존재하기란 불가능하다.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고, 너 하나 잃고 내 전부를 잃은 것 같은.
잠시 잠깐 모두 잊고 홀연히 떠나고 싶은 마음을 눈치 챈 걸까. 전병규님의 소금 연주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가 허전한 마음 한 구석을 채운다. 부드럽지만 묵직하고 낮지만 깊은 가락이 너에게 보내는 기도가 되어 울려 퍼진다. 뒤이어 흘러나오는 김정희와 시놀이 팀의 아련한 한 편의 시가 잔잔한 울림을 이어간다. 음악에 취해 노래에 취해 꽃과 한 몸 되듯 젖어 본다.
보슬비도 너에게는 기도가 되어
다만 쓸쓸한 것들은 가라
바다는 제 푸른 고집에
수평선만 내리치다가
거기 흔들 수 없는 슬픔이
다시 등대로 돌아와
무심한 어둠의 비늘을 벗긴다
울 없는 바다 너울을 부드럽고 힘차게
울 없는 파도의 경련 끝에서
하얗게 파닥이는 자유함이여
뿌리를 쫓아
미련 없이 뒤틀리고 가라앉으면
꽃이 된다고
꽃잎의 옆구리마다 고름이 삐져나오듯 박히는 꽃술이
스스로를 확인하며 상처를 입히고
상처는 제 근본을 핧으며 사랑이라 말할 때
바다가 숲으로 들어 푸른 이파리가 되고
너의 질리도록 새파란 정절이
감옥에서 꽃아!
나는 더디어 온전한 기쁨이구나
-김순남 ‘탐라산수국’전문
꽃은 상처의 내성(耐性)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표현할 때 종종 꽃을 건네지만 가끔은 사랑의 유효를 확인하는 수단에 불과할 때가 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의 슬픔이 꽃이 되어 돌아올 때, 꽃은 화살이 되고 통증이 된다. ‘꽃잎의 옆구리마다 고름이 삐져나오’는 걸 알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러다가 등 돌린 사랑이 그리워 다시 불러보는 꽃이라는 이름.
화려한 원색보다 더 눈부신, 검은 돌담 아래 핀 연보랏빛 수국이 잊고 있던 너를 닮아 있었다.
너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니…
사회-정민자
그림-유창훈
유포니움-황경수
플롯-이관홍
소금-전병규
반주-현희순
시낭송-김정희와 시놀이 (김정희·이정아·이혜정·장순자)
영상-김성수
사진-허영숙
음향-최현철
글-김은정
*다음 바람난장은 6월 13일 오전 10시 외도 월대천에서 진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