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만, 제2대 제주도의원
김지석, 도민 세금 부담 경감
김지수, 한국해운업계 중진
김지원, 시 ‘애원’으로 등단
김지태, 순조22년 대정현감
김지호, 조천리 출신 명필가
김지환, 노동 야학 항일운동
▲김지金志:1835(헌종1)~1896(건양1), 선비. 민란 주도, 일명 김준현(金俊鉉). 자 영보(英甫), 호 동곡(桐谷), 본관 광산.
애월읍 하귀리 ‘귀리’의 김문환(金文煥) 아들이다. 1858년(철종9)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절목을 마련해 당시의 관리들에게 경고했다. 당시 삼정(三政)의 문란과 탐관오리들이 득실거려 부패가 만연된 실상에 분통을 이기지 못해 1890년(고종27) 11월에 저항운동을 일으켰다.
이듬해 정의현에서도 이완평(李完平), 현계환(玄啓煥) 등이 민란을 일으키자 목사 조균하는 책임을 지고 1891년 8월 파면됐다. 민심을 움직여 주성을 함락하고 민원을 산 관리의 집을 부수고 추방했다.
이때 제주목사 조균하(趙均夏)는 이방(吏房) 김중옥(金仲玉)을 시켜서 김지에게 뇌물을 주어 무마시키고 난민을 해산했다. 이를 소위 경인민란(庚寅民亂) 혹은 ‘김지 난’, ‘김진사 난’이라고도 부른다.
김진사의 얼굴은 호랑이 상인데 몸이 몹시 비대해 배가 항아리처럼 컸다고 한다. 전도에 걸쳐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 그가 민란을 일으켰는데 오히려 그가 후일 뇌물을 받은 것이 탄로가 났다. 이에 난민들은 김진사를 붙잡아와 눕히고 모여든 군중에 의해 발로 짓밟도록 하니 이때 불알이 짓밟혀 죽었다고 전해진다.
▲김지만金智萬:1921~?. 남원읍 신흥리 광산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중졸에 공무원 19년 봉직.
1956년 8월 13일 제2대 도의원 선거에 남제주군 제5선거구에 자유당 후보로 나서 민주당 후보였던 장수두(張水斗)를 누르고 당선됐다.
1960년 4․19혁명으로 정계에서 물러나 제주 성내 칠성로 자택에서 광복 후 첫 번째로 광산김씨 제주도 족보를 발간하는 데 힘썼다.
▲김지석金之錫:생몰년 미상, 고려 고종 때의 청백리. 제주부사(濟州副使).
1259년(고종46) 겨울, 제주에 부임했다. 당시 제주의 관예(寬例)로는 남자가 15세 이상이면 1년에 콩 1곡(斛)을 세금으로 내고, 또 관리 수백인은 매해 말 한 필을 납부하게 돼 있어 부사(副使) 판관은 이를 분수(分受)하고 있었다.
정기(井奇) 이저(李著) 등 두 사람은 일찍이 제주의 목민관이 돼 탐장을 일삼아 면직된 바가 있었다.
김지석(金之錫)이 부임하는 날, 그는 공두공마(貢豆貢馬)의 폐를 없애고 청렴한 관리 10명을 뽑아 청정을 베풀기를 물과 같이 맑게
했다.
이로써 관리와 도민들은 마음으로 복종하게 돼 앞서 왔던 경세봉(慶世封)이라는 목민관과 함께 청백리라 했다. 제주도민의 속언에 “이전에는 경세봉이 있었고 뒤에는 김지석이 있었다”라는 말이 유행됐다.
▲김지수金池洙:1933~생존. 애월읍 애월리 출신. 제주농업학교 4년 졸업. 목포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대학교 법대 졸업. 한국해운업계 중진. 서울 서초동 거주.
▲김지원金志遠:1905(광무9)~1926(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의 시인. 본관 김해.
조천읍 조천리 ‘조천포’에서 아버지 김항면(金恒勉)과 어머니 송숙부(宋淑婦) 사이의 6남매 가운데 막내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천재라고 일컬어 그의 조부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의 문장력을 물려받은 손자라고 했다. 외조부가 바로 대정현감을 지냈고 방성칠(房星七) 난리 때 창의(倡義)를 일으킨 최고 갑부 송두옥(宋斗玉)이기 때문이다.
김지원은 서울로 올라가 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동소문 밖에서 하숙할 때 동향의 황순하(黃舜河)와 조카 김형달(金亨達) 등과 함께 지냈다.
그는 문학 소양을 쌓기 시작하더니 1924년 ‘금성(金星)’지의 독자란에 투고, 1926년 1월호의 ‘조선문단’에 시 ‘애원(哀願)’이 입선됐다. 이해에 역시 ‘조선문단’ 11월 호에 ‘거지 할미’가 당선돼 첫 번째 제주의 현대시인으로 등단했다. 이 ‘거지 할미’를 평하기를 “대담하게도 시적 감정을 유린한 작품이다. 그 대담한 것을 취했다”고 했다.
또 1926년 3월 ‘조선문단’ 제14호에 ‘유곽’과 ‘마즈막 올리는 기도’, ‘화산(火山)의 노래’를 발표하고 동년 5월 ‘조선문단’ 제16호에 ‘Nihil’, ‘허무의 왕국’을 발표했다.
동년 10월 동아일보에 시 한 편을 남기고 그후 소식이 끊겨 온 가족과 친지들이 찾아 헤맸으나 헛수고였다. 일설에는 만주 혹은 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행방불명 됐다고 한다. 가족들에 의해 1927년 5월 사망한 것으로 처리됐다.
그는 유복자로 태어나 항상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왔다. 더구나 1922년 그의 정신적인 지주(支柱)였던 외조부 송두옥이 타계하자 심한 감상주의로 빠져들었다.
외조부의 3년 상을 마치자마자 설상가상으로 그를 애지중지(愛之重之)하던 조부 김희정마저 이승을 뜬 상태여서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인생의 허무함을 느껴 오로지 시(詩) 창작에만 몰두했다.
이듬해 서울에서는 6·10 만세운동이 일어나 세태의 추이에 민감한 그를 가만있게 하지 않았다. 1926년 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 황제가 훙어(薨御)해 6월 10일 바로 인산(因山)날이었다. 경성제대(京城帝大), 연희전문, 중앙고보 등에 재학하던 학생들의 거센 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일제는 1000여 명이나 되는 우리 동포를 체포해 투옥시켰다. 존왕(尊王)사상과 항일운동으로 일관해 온 그의 내외가(內外家)의 분위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이와 달리 그의 조부가 타계한 후 실의에 빠져 스스로 갈등을 이기지 못하여 염세(厭世) 자살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어느 것도 확인된 바 없다.
▲김지태金持泰:1789(정조13)~?, 문신. 대정현감. 평안도 개천 출생. 본관은 연안.
장환(章煥)의 아들이다. 1810년(순조10) 문과 식년시에 합격했다.
1822년(순조22) 5월, 고창빈(高昌彬)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23년 2월에 파직됐다.
1922년 대정 사람 강응록(姜應祿)의 부인 이씨를, 제주위유어사(濟州慰諭御史) 조정화(趙廷和)가 계청해 정표했다.
▲김지호金址鎬:1853(철종4)~1897(광무1), 문인. 자 공서(公西), 호 만성(晩醒).
본관 김해,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혹서에는 지호(志鎬)라고 표기된 바도 있다.
글을 잘 지어 문명이 있으며 글씨도 잘 썼다. 음 7월 16일 조천의 연북정시(戀北亭詩) 기구(起句)에 “戀北亭前波萬里 蘇東坡後月千秋”라고 읊으니 모두 놀라워했다.
▲김지환金址煥:1913(일제강점기)~1969, 조천리 노동 야학 항일운동. 본관 김해.
김후식(金厚植)의 아들로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의 종제, 제주청년동맹 조천 지부 맹원이다. 조천 지부의 활동은 가장 두드러졌다.
청맹원(靑盟員) 중심이 돼 지역 소년운동의 지도, 여성을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또 신좌(新左)문고의 운영과 노동야학 개설에 따른 계몽활동도 했다.
그는 1930년 4월 24일 징역 6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4년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