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한마디가
그 한마디가
  • 고시연 기자
  • 승인 20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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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옥 수필가

시시때때로 변화를 일삼는 기후 앞에서, 우리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공들였던 밭작물이 말라버리고 비가 너무 내리면 곡식들은 몸져눕게 됩니다. 작년 1월부터 남편은 돌이 박혀있던 땅을 매일 일구며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땅으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쉼 없이 흘러내렸던 그이의 땀방울이 아직도 흙속에 스며있는 듯합니다.

그해 6월 남편은 처음으로 개간한 땅에 콩 씨를 심었습니다. 오일장에서 마련한 흑태로 밭골에 정성을 기울였지요. 하루는 밭을 둘러보고 나서 꿩 때문에 싹이 자라지 못한다며 날짐승을 원망하더군요. 아예 까치란 녀석은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살금살금 주인 눈치만 보고 있더랍니다.

벌써 사십 년이 흘렀습니다. 혼기를 넘겼던 여자와 연하의 남자가 만나서 꿈꾸듯 살아 온지가. 그새 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했지요. 세월은 어제 같은데 늙음이란 불청객이 슬며시 자리매김하고 있더군요. 살아가며 부부가 걸머진 등짐은 서로가 다름을 인정할 때 가벼운 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느 날, 그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당신이 맘에 든다고 말씀을 하셔서, 고부간의 갈등은 줄일 수 있다 싶어 나와 인연을 맺었다고.’

서른셋에 혼자되신 어머님은 남모르는 외로움이 크셨겠지요. 막막한 시절을 마디마디에 엮으며 곤고한 삶을 견뎌낸 분이셨습니다. 세 살배기 아들과 3개월 된 갓난이를 아내 곁에 남겨두고 아버님은 먼 길을 어찌 떠나셨을까요.

집에 제일이 돌아올 때면 세월아 네월아 하던 사람이 바지런을 떨기 시작합니다. 떡 반죽과 누런 호박 썰기 등 팔 힘이 드는 일은 남편 몫이지만, 제사를 마치고 나면 속내에 바람이 일 때도 더러 있었지요. 어설픈 집착이었을까요. 돌아보면 어머님은 재물보다 귀한 지혜를 마음 닿는 곳마다 조용히 안겨 주셨던 분입니다.

해거름 녘에 딸아이에게 건네주었던 남편이라는 시를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저도 그랬습니다. 젊은 시절, 남편을 미워도 해보고 남편이 먼 남자처럼 여겨질 때도 많았지요. 때로는 내가 낳은 새끼들을 품고 훨훨 날아가고 싶을 적도 있었습니다.

부부는 어떤 인연으로 맺어진 사이일까요. 어쩌면 전생에 부부의 연분이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늙은 다음에서야 서서히 어른이 되는 걸까요. 오늘도 지나온 날들을 한품에 끌어안으며 저녁을 짓곤 합니다.

그해 가을 초입에 백두산 천지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고도 때문인지 남편은 초반부터 발걸음이 무뎌지더군요.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더니, 거스르지 못하는 것은 세월만이 아니겠지요.

말로만 듣던 천지가 모습을 드러내 보입니다. 삼대가 공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던 천지! 연녹색 물빛이 다가와 눈을 감게 만듭니다. 천지와 맞닿은 저 조각구름은 무심히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요.

1442개 나무계단을 내려가야 숙소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묵은 잎을 떨구고 사람길이 되어준 나무의 영혼이 일상을 헤아려보게 해줍니다. 떠오르는 해도 함께 보았고 비바람도 함께 받아들였던 우리 두 사람. 언젠가는 서로가 다른 세상의 길을 걷게 되겠지요. 그 쓸쓸함을 오랫동안 미루고 싶다는 생각은 삿된 욕심일까요?

내일의 여정을 위해 행장을 내려놓는 평화로운 시간. 눈 맞대며 마시는 찻잔 속에도 못 다한 이야기가 가득 채워져 있었지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이가 입을 엽니다.

당신도 많이 늙었소. 잠든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파요.”

그 한마디가 사십 년 세월 속으로 녹아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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