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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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선 수필가

해마다 유월이 오면 그리운 사람이 있다. 그분은 나의 작은아버님이시다. 작은아버님은 강원도 화천지역에서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셨다. 작은아버님은 4.3사건 당시 평대리로 피난 갔다가 이듬해 다시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와 재건의 붐에 어울리는가 했더니,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셨다. 젊은이들이 너도나도 풍전등화 같은 국가방위를 위해 고향을 등지던 때다. 1951년 봄, 내 나이 13살 때이다.

이듬해 봄, 군복을 입고 허리에 권총을 차고 배낭을 둘러메고 휴가를 오셨다. 육군소위로 강원도 화천지구 포병부대 장교로 근무하다 왔다고 하셨다. 작은아버님의 훌륭한 모습이 고향마을에 알려져 그 당시 나는 조카로서 작은아버님이 무척 자랑스러웠고, 대한민국의 훌륭한 군인으로 임무를 마쳐 돌아와 주기를 바랐다. 작은아버님이 휴가오셨을 때 삼 일간 나는 작은아버님과 지내다 제주시로 돌아왔다. 제주시에서 유학을 하던 나는 학교 때문에 작은아버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내년 휴가를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작은 아버님은 아버지 형제 62녀에서 다섯 번째로 장남의 아들인 나와는 사이가 너무도 좋았다. 제주시에서 유학하던 유일한 조카인 나는 작은아버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작은아버님은 여러 형제 중에서도 특출하게 뛰어나 중학교 졸업 학력이나 지식이 풍부하였고 대인 관계 화술도 능통하여 우리 종가에서도 평판이 좋아 인기가 많았다.

휴가를 다시 와서 만나자고 하시던 아버님은 자그마한 나무 상자 속에 넣어진 유품과 함께 전사 통지서가 휴가를 대신했다. 면사무소 직원이 할머님에게 전하고 간 작은아버님의 전사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그렇게 그립고 보고싶은 작은아버님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깝게 슬퍼해도 소용이 없었다. 바다낚시를 같이 하고, 틈만 있으면 축구놀이도 같이하며 자상하게 글도 가르쳐 주시던 분. 그 어느 조카보다도 나를 많이 사랑했던 작은아버님을 6.25 전쟁이 앗아가 버렸다. 서글프면서도 자랑스러운 아버님이셨다. 스물네 살, 아직 다 피워보지 못한 청춘의 종말이었다.

참으로 전쟁의 목적은 단순하다. 선량한 민간인까지 죽여가면서 독재자의 영토확장목적으로 벌어진다. 세계전쟁사를 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국제정치의 본질로 바라본다. 국제정치는 전쟁에서 이기는 자가 승리자가 된다. 그래서 전쟁은 희생을 요구한다. 도덕도 질서도 외면한 채 인간의 고유한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간다.

이성을 잃게 하는 전쟁은 자유와 평화의 존재를 짓밟아 버리고 인간의 재산과 생존권을 고스란히 파괴하며, 고난과 빈곤 그리고 질병 속에서 신음하게 만들어버린다. 전쟁은 결과적으로 파괴 그 안으로 들어가게 만든다.

한국전쟁 삼 년은 국민에게 뼈저린 비극의 현장 체험을 맛보게 했다. 나의 작은아버님과 같은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다시 한번 기려야 할 때다. 현충일, 호국 보훈의 달 유월을 맞이할 때마다 그리움으로 가슴을 억누르게 한다.

올해로 70주년을 맞는다. 한국전쟁은 작은아버님을 비롯한 6.25 참전 국군장병과 16개국 참전유엔군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6, 이 보훈의 달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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