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서 함께한 두 형제 화랑무공훈장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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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안택영.택봉 형제 6.25전쟁 70주년 맞아 훈장 수여..."하늘에 있는 형님 훈장으로 위로"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화랑무공훈장을 받게 된 안택봉씨(왼쪽)가 전사한 둘째 형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아들인 안택남 제주도의회 의원.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화랑무공훈장을 받게 된 안택봉씨(왼쪽)가 전사한 둘째 형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아들인 안창남 제주도의회 의원.

“강원도에서 전사한 형님의 유해라도 찾았으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6·25전쟁 70주년을 앞두고 화랑무공훈장을 받게 된 안택봉씨(88·제주시 삼양동)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난한 집안에서 4·3의 풍파를 겪은 안씨의 3형제 중 2명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으로 참전했다. 안씨보다 3살이 더 많았던 둘째 형 고(故) 안택영씨는 22살의 꽃다운 나이에 강원 원통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3보병사단 일병이던 그의 형은 전사했지만 유골은 끝내 찾지 못했다. 해마다 안씨가 제사를 올리며 넋을 위로하고 있다.

이들 형제는 오는 25일 신산공원에서 열리는 6·25전쟁 70주년 기념식에서 화랑무공훈장을 받는다.

안씨는 제주농업학교 학생이던 19살에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1952년 일등병으로 진급, 지리산 전투에서 인민군 박달 소장을 체포하는데 공을 세웠다.

안씨는 그해 7월 갑종 23기 사관후보생 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했다.

9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배치돼 강원도 철원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됐다. 안씨는 “빗발치듯 쏟아지는 포탄을 뚫고 봉오리를 넘었으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공군이 포진해있었다”며 “소대원을 지휘하며 싸우던 중 오른팔에 총알이 박히면서 후퇴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안씨는 이어 “고지에서 내려오는 길에 포탄에 찢겨진 시신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어서 처참했고, 한 부대는 전멸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고 말했다.

중대장(중위) 당시 안택봉씨(앞줄 오른쪽 세번째)가 장병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모습. 맨 앞줄은 소대장(소위)들이며, 제주 출신도 있었다.
중대장(중위) 당시 안택봉씨(앞줄 오른쪽 세번째)가 장병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모습. 맨 앞줄은 소대장(소위)들이며, 제주 출신도 있었다.

1952년 10월 백마고지는 열흘 사이 주인이 12번이나 바뀌었다. 1만명의 국군은 이 전투에서 중공군 3만명을 상대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국군은 중공군을 백마고지에서 격퇴했다. 중공군 1만4000여명, 국군 3500여명이 숨지거나 다쳤다. 전투 당시 백마고지에 쏟아진 탄환은 아군과 중공군을 합쳐 27만발이었다.

치열한 격전을 치르면서 국군이 흘린 핏물이 산야를 뒤덮었던 백마지구 전투에서 결국 승리하면서 곡창지대인 철원지역 평야를 지켜낼 수 있었다.

마산육군병원에 후송된 안씨는 퇴원 후 다시 전장에 투입됐으나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됐다. 그는 1956년 중위로 예편했다.

중대장(중위) 당시 안택봉씨(맨 앞줄 안경 쓴 이)가 선임 하사관들고 함께 한 모습.
중대장(중위) 당시 안택봉씨(맨 앞줄 안경 쓴 이)가 선임 하사관들고 함께 한 모습.

안씨는 1966년 초대 삼양동장을 역임했고, 1968년 예비군이 창설되자 삼양동 예비군동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삼양동장 당시 월급이 1만2000원인데 예비군동대장은 1만원에 머물렀지만, 장교라는 자부심을 갖고 동대장으로 지원했다”고 말했다.

안씨는 전역 후 ‘특별상이용사증’을 받고, 연금과 자녀들의 학비를 지원받을 수도 있었지만 등록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전우들이 희생됐고, 팔다리를 잃은 장병도 있는데 장교인 내가 특별상이용사로 이름이 올리는 데 부끄러워서 등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안씨는 1954년 국방부장관 명의로 화랑무공훈장 서훈이 수여됐지만, 훈장은 66년 만에 받게됐다.

안씨는 “둘째 형님(안택영)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저만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다”며 “하늘나라에서라도 훈장을 받게 된 형님의 넋을 위로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1954년 중대장이던 안택봉씨가 문관과 함께 한 모습. 사진 뒤쪽에는 땅을 파서 만든 중대본부 전경.
1954년 중대장이던 안택봉씨가 문관과 함께 한 모습. 사진 뒤쪽에는 땅을 파서 만든 중대본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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