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출세길 마다하고 후학 양성 헌신…유학 확산 이바지
(139) 출세길 마다하고 후학 양성 헌신…유학 확산 이바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진용, 경서에 밝고 행실 깨끗…장수당서 삼읍 청소년 교육
 김진현, 이화여고보 학생 운동 참여…체포 후 모진 고문 견뎌
 김진희, 동지 한영섭 사망 후 혁명가 고창하며 일본에 저항
 김창옥, 일본 야마구치현서 항일…공훈 기려 애족장 추서돼
 김창휘, 재일교포로 제주개발협회 회장 재임…고향 발전 기여
오현단 내 귤림서원 경신재 터에 세워졌던 1910년대 제주농업학교 전경. 김진용은 교육 진흥을 위해 오현단에 건립된 장수당에서 삼읍의 청소년들을 가르치며 유학을 확산시켰다. 출처 :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오현단 내 귤림서원 경신재 터에 세워졌던 1910년대 제주농업학교 전경. 김진용은 교육 진흥을 위해 오현단에 건립된 장수당에서 삼읍의 청소년들을 가르치며 유학을 확산시켰다.
<출처 : 제주시 발간-제주성(濟州城) 총서>

김진용金晉鎔1605(선조38)~1663(현종4), 선비. 향현(鄕賢). 자는 진숙(晋叔), 호는 명도암(明道菴), 본관 광산.

구좌읍 한동리 -모슬에서 김경봉(金景鳳)의 차남으로 태어나 처가인 봉개리의 명도암으로 옮겨 살았다

아들 계륭(繼隆)과 계창(繼敞)도 문과에 급제했다.

제주에 유배온 간옹(艮翁) 이익(李瀷)에게 글을 배워 발군의 실력이 널리 알려졌다

또 경서에 밝고 행의(行誼)가 깨끗해 성균관이나 문묘에 출입하면서 사류(士流)와 어울리더니 1635(인조13) 진사시에 합격했다

1643년 숙녕전(肅寧殿) 참봉에 임명됐지만 후생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어 이를 사양해 관계에 나아가지 않았다.

드디어 제주로 귀향, 당시 제주목사 이회가 교육 진흥을 시도하면서 영곡 고득종(高得宗)의 옛 집터(현 오현단)에 장수당(藏修堂)을 건립하고 삼읍의 청소년을 교육했다

이때 김진용의 경륜을 인정해 도맡아 가르치게 하니 이 지방 유업이 왕성, 본도의 풍속이나 교화가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후인들이 그의 살았던 곳으로 이름 지어 명도암 선생이라고 칭했다. 또 그를 두고  “명경결행(明經潔行)이요, 남방유종(南方儒宗)이다라고 평했다.

1831(순조31) 유림들의 진정에 따라 영혜사(永惠祠)에 추향돼 이곳에 모신 분은 이약동, 이회, 이형상, 김정과 김진용 등 5위이었다. 그 후 이예연(李禮延), 임형수(林亨秀)를 추향하게 되니 모두 7위가 됐다.

1849(헌종15) 제주목사 장인식(張寅植) 때에 고득종(高得宗)의 봉향처인 향현사(鄕賢祠)로 김진용을 이안(移安)해 추향했다

1871(고종8) 신미훼철(辛未毁撤)에 의해 폐지됐던 향현사는 수년 전에야 오현단에 다시 세워졌다

196510월 명도암 선생 탄신 6회갑(六回甲) 기념으로 명도암 김진용 선생 유허비명도암-오름산기슭에 세웠다. 이 비문은 이숭녕(李崇寧) 박사가 짓고 글씨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김진현金鎭賢1911(일제강점기)~ 2001, 여성 항일운동가. 서울에서의 항일학생운동에 참가. 본관 김해

산북 조천리 조천포(墨洞)’에서 태어나 1918년  한림(翰林)으로 옮겼다

제주시 서문로에 있는 영흥학교(永興學校)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이기풍 목사의 부인 윤함애(尹咸愛)가 교육을 담당했다

김진현은 상경해 경기여고보(京畿女高普), 이화여고보(梨花女高普), 동덕여고보(同德女高普) 3개교에 응시, 경기여고보에는 불합격하고 이화와 동덕에는 합격했으나 이화여고보를 선택했다

1929113일 전남 광주에서 한국과 일본의 기차 통학생끼리 충돌이 생겨 전국적인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이화여고보의 학생지도자 최복순(崔福順)은 광주학생에 대한 지원과 항일학생운동을 위해 특히 서울 여학생의 궐기를 느끼고 있었다

시내의 진명(進明), 숙명(淑明), 근화(槿花), 정신(貞信), 동덕(同德), 배화(培花) 등 여자고보교의 여러 대표자들에게 설명하고 격문 내용도 결의, 경찰의 학교 출입을 반대했다

또 각 학교의 대표들도 모여 19301159시를 기해 동시에 궐기하기로 결의, 이화여고보(梨花女高普) 대표로 김진현, 최윤숙이 참석했다. 이 날 오전 10시를 기해 봉기(蜂起)가 전개됐다.

116일 김진현은 서대문경찰서(西大門警察署)에 체포당해 약 2개월간 조서를 받으면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또 졸업을 목전에 두고 제적 처분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김진희金晋熙1907(융희1)~?. 항일활동, 본관 경주.

김근서(金根瑞)의 아들로 산북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동지 한영섭(韓永燮)이 일본 동경에서 사망해 그 시신이 1931119일 향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는 조천읍 함덕리에서 김두성(金斗性), 김일준(金日準), 고종건(高宗虔), 양구문(梁龜文) 등과 함께 혁명가를 고창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세칭 함덕리 한영섭 추도비문 사건이라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높이 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4주년 기념일 즈음인 1993413일에  건국유공 대통령표창을 추서했

.

김창옥金昌沃1917(일제강점기)~1946(미 군정기),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항일활동.

본관은 상주(尙州), 김유환(金有桓)의 아들로 산북 신촌리 숙군에서 태어났다.

19362월경 도쿄로 가서 우편배달부 또는 경시청(警視廳) 고원(雇員)으로 근무, 사립 목백(目白)상업학교를 야간으로 졸업하고 입정(立正)대학 고등사범과에 입학, 194112월 중퇴했다.

1944106일 야마구치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수형 생활 중 1945815일 조국 해방으로 석방됐으나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활의 후유증으로 이듬해 72일 사망해 대를 이을 자손마저 남기지 못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3815일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창휘金昶輝1929(일제강점기)~2002, 재일교포, 재일본대한민국민단중앙본부 감찰위원장, 호는 호경(湖京), 본관 광산

제주시 이호동 -에서 태어나 13세 때 일본에 건너가 야오쯔중학에 입학했으나 도쿄(東京)도 문경구(文京區)에서 천타목에서 대규모 찻집, 수입상, 레저센터 경영 등을 했다

이후 민단 동본부 감찰위원, 부의장, 중앙감찰위원, 부단장을 거쳐 19913월에는 감찰위원장에 당선됐다

또 재일(在日)제주도민회장, 재일도쿄 상업은행 고문, 도쿄상공회의소 고문, 문경구 한일(韓日)친선협회 부회장, 광산김씨 제주도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 무궁화장,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

재력을 이뤄 제주개발협회에서는 상무이사, 부회장, 2(1975·1984)의 회장에 재임하면서 고향 발전에 이바지했다.

김창휘는 민단에서는 경제담당부단장을 역임했다. 그는 약관(弱冠)에 민단 활동을 시작해 34세 때 이미 동경(東京)지부 단장(團長)에 선출됐다. 그때 언론에는 전국 최연소 민단단장 출현이란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