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 여가수’를 다시 읽다
‘대머리 여가수’를 다시 읽다
  • 제주일보
  • 승인 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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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순, 문학박사/논설위원

‘대머리 여가수’(1948)는 외젠 이오네스코(프랑스, 1909~1994)의 작품으로 부조리극의 효시라 일컬어진다. 연극에는 두 쌍의 중년부부, 가정부, 소방대장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대화는 비논리적이며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괘종시계가 17번 울리는데 여주인공은 당연한 듯 “어, 아홉시네”라고 엉뚱한 말로 시작되는 연극은 마지막까지 앞뒤 맞지 않는 상황이 이어진다. 이 연극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이오네스코의 연극은 현대 사회의 중요한 문제인 맹목적 추종, 전체주의, 절망과 죽음을 공격한다. 초현실주의의 대가가 관객과 비평가에게 던지는 도전장’이라 평했다. 다시 말해 이오네스코는 인간들의 막연하고 근거 없는 집단적 믿음 앞에 그들이 믿으려 하지 않는 적나라한 현실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대머리 여가수’는 마치 거울을 들이대듯 인간의 부조리한 상황이나 모습을 제시하지만, 그것에 대해 특정한 반응을 유도하지 않으며 어떤 대책을 암시하거나 충고하지는 않는다. 그릇된 집단적 믿음을 떨쳐버리고 현실을 직시하며, 거기서 문제점을 찾아내어 해결하려는 노력과 과정은 철저히 관객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요즘 들어 부쩍, 대학시절에 공연했던 연극 ‘대머리 여가수’가 생각난다. 당시는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서도 결코 공감하지 못 했던 이 연극이, 지금의 우리가 사는 세상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의 정의연 논란을 접하면서 더 그렇다.

지난 5월 7일에 있었던 이용수 인권운동가의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정의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회계부정, 배후설 등 위안부 피해자 당사자인 이용수 인권운동가와 윤미향 정의연 전 이사장을 둘러싸고 언론과 여론은 둘로 갈라지고 여기에 정치권이 합세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진실은 뒤로하고, 같은 신념이나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맹목적 추종’과 ‘집단적 믿음’으로 자기편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진실을 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이오네스코가 부조리극을 통해 현실을 비유한 것처럼 말이다.

정의연은 30년간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들이 ‘위안부 운동’을 세계에 알리고 ‘보편적인 여성인권·평화 운동’으로 키우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다. 이처럼 악조건 속에 시민단체 활동을 해온 이들에게는, 우리는 말을 아끼게 된다. 설령 그 과정에서 실수나 잘못이 있다 해도 대체로 관대하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해준다는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이다. 하지만 목적이 선하다고 과정에서 불거진 의혹을 덮을 수는 없는 일이다. 두 번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될 아픈 역사문제이기에 더 투명하고 더 엄격해야 한다. 또한 의혹이 오해라면 더더욱 그 진실은 가려져야 하는 것이다.

정의연 사태 발생 후 대통령은 ‘이번 논란으로 시민단체 등의 후원금, 그리고 정부와 지자체의 보조금도 투명하게 관리’할 것이라고 밝힌바 있다. 차제에, 더 늦기 전에,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다른 모든 단체와 기관에 대해서도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아픈 역사를 앞세워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공명심(公明心)인지 공명심(功名心)인지 또한 잘 들여다 봐야할 일이다. 관리·감독은 비단 정부·지자체만의 몫은 아니다. 부조리극을 관람하고 극에서 문제점을 찾아내어 해결하는 것이 관객의 몫이듯, 이들 단체와 기관들에 대한 문제의 유무와 감독의 일정 부분은 우리 국민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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