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간풍(竹間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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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정건영 소설가의 옛 스승 회고담 일부다. 스승은 청록파 3인 중 한 분인 혜산(兮山) 박두진 시인.

혜산 시인은 정 작가의 연세대 은사. 정 작가는 대학신문 ‘연세춘추’ 편집국장으로 혜산 시인 댁을 유난히 드나들었단다. 예사로운 연이 아니었다. 정 작가는 졸업하면서 해병대 사관후보생으로 군에 입대했다. 나중에 청룡부대 전투요원으로 월남에 파병돼 트이호아, 추라이 전투에 참전한다.

전쟁은 참상이었고, 인간이 숭고한 정신적·영적 존재임이 허구란 사실도 밝혀졌다. 짜빈동 전투로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혔다고 한다. 방어진지 안팎에 240여 구의 월맹군 시체가 내장을 드러낸 채 흩어져 있고, 교통호에는 인간의 피가 개울을 이뤘다고. 정 작가가 쏜 포탄도 살생에 아주 유효했을 거라고….

육신은 멀쩡히 귀국했으나 내면은 허물어져 있었다. 이때, 화두 하나에 허무했다 한다. ‘총구 앞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결국 소설에서 돌아앉았다 한다. 5년 군복무 뒤, 소설의 빈자리를 등산과 수석으로 메워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단편 「임진강」으로 등단했고, 등단 잡지를 들고 선생을 찾아 뵌 자리에서 소설을 쓰겠다는 말씀을 드렸다는 것. 선생께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하신 당부의 말씀.

“정 군, 시는 써 봐야 돈이 되는 것이 아니야. 그래서 시인들은 문학을 물질의 도구로 삼아 글이 타락하는 일은 드물지. 그렇지만 소설은 잘못된 길로 빠져 붓이 흐려지는 경우도 있어. 한번 빠진 통속(通俗)에서 되돌아오겠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어. 일단 오염된 붓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 조곤조곤 낮고 느리게 하신 그 말씀이 천근의 무게도 다가오더라는 것이다. 그날 선생께서 특유의 ‘혜산체’로 쓴 글씨 한 점을 주셨다. 말씀이 낙관이 된 셈이다.

‘竹間風’, 대숲의 바람처럼 항상 맑은 생각을 지니라 함이었다. 그 글씨, 집필 테이블 위에 걸려 항시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 한다.

정건영, 그는 이제 문단 생활 근 40년인 한국문단의 원로다. 짧지 않은 시간 속에 갖은 풍상에 부대끼면서도 스승의 당부에 어긋난 붓놀림은 일절 없었다고 술회한다. 스승의 뜻과 달리 소설을 쓰면서도 세사에 오염된 적이 없다는 단호함으로 들린다. 문단에 흔치 않은 사제간의 따뜻하고 정겨운 미담이 아닌가. 그 스승에 그 제자란 생각이 든다.

나는 정 작가와 혜산 시인, 사제의 연에 대해 몇 번을 되새긴다. 인연은 필연이다. 정 작가가 문학사에 청록파 3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커다란 자취를 남긴 혜산 시인을 은사로 만난 것. 혜산 시 「묘지송」, 「도봉」, 「해」는 교과서에 실려 국민 정서를 한껏 고양(高揚)시켰음을 우리는 익히 안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 현실 초극의 의지를 시혼으로 승화함으로 길 잃고 방황하던 이들에게 정신의 등불을 밝혀 들었던 시인.

“박두진 선생님, 저는 남에게 드러나지 않은, 선생님과의 평범한 일상, 그렇지만 ‘정 군’인 저에게는 그런 선생님의 일상의 모습을 통해 심상에 드리운 그림자가 세월 따라 자라나 거목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씨앗을 심던 선생님과의 일상이 저에게 얼마나 소중한 순간이었는지를 거듭 깨닫습니다. 선생님은 시공을 초월해 스승으로 제 인생에 자리하고 계십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정 작가의 간절한 육성이 행간으로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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