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한국전쟁 때 자원입대한 소년, 해병대 ‘별’이 되다
(140) 한국전쟁 때 자원입대한 소년, 해병대 ‘별’이 되다
  • 제주일보
  • 승인 2020.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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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채옥, 애월읍 납읍리 출신 재일교포…거류민단 지단장 등 역임
 김천덕, ‘김천덕전’으로 알려진 열녀…1577년 가문에 정려 내려져
 김치부, 재일교포 사업가…연동 전화 사업·새마을회관 건립 추진
 김치용, 서당 훈장…오현단 경신재 창설해 유생 양성에 힘 쏟아
 김치현, 해병대 제4기생으로 인천상륙·서울탈환작전 등 참여해
한국전쟁 때 미군이 찍은 사진으로 두 척의 미 수송선(LST)이 안덕면 화순해변에 정박해 있는 모습이다. 김치현은 한림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일 당시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자원, 해병대 제4기생으로 수많은 전투를 겪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한국전쟁 때 미군이 찍은 사진으로 두 척의 미 수송선(LST)이 안덕면 화순해변에 정박해 있는 모습이다. 김치현은 한림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일 당시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자원, 해병대 제4기생으로 수많은 전투를 겪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채옥金采玉()1928(일제강점기)~ ?, 재일교포, 여성운동가, 본관 김해.

애월읍 납읍리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경도(京都)시립 명덕고등여학교를 졸업해 효고(兵庫)현 니시미야(西宮)시 율전(律田)동에서 살면서 21녀의 어머니가 됐다.

대한민국 거류민단 니시미야지부 지단장, 재일 한국부인회 니시미야지부 상임고문과 대한불교 부동원(不動院) 주지(住持)로 있었다.

애월읍 곽지리 바닷가 과물 앞 김천덕 열녀비.
애월읍 곽지리 바닷가 과물 앞 김천덕 열녀비.

김천덕金天德()1514(중종9)~?, 열녀, 산북 애월읍 곽지리 과오름의 사노(寺奴) 연근(連根)의 아내.

김천덕은 결혼한 지 20년 만에 남편이 진상물 수송차 출항 중 화탈(火脫)섬과 추자섬 사이에서 침몰돼 익사했다. 그는 남편의 삼년상을 치르면서 삭망제와 절사 때 화탈섬을 향해 하늘에 슬픔을 호소했다.

그 후 귀양살이 온 자가 김천덕을 꾀었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그자가 관가에 거짓을 아뢰어 위협, 곤장 80대를 맞게 하니 김천덕은 거짓 순종하는 체하면서 빠져나왔다

그가 재물을 탐내고 있음을 알고 옷 한 벌, 소 한 마리, 무명 30()을 보내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또 명월방호소(明月防護所)의 여수(旅帥)가 권세를 믿고 김천덕의 부친 김청(金淸)에게 간청해 김천덕과의 혼인 허가를 받아냈다. 김천덕은 통곡하며 다음 날 아침 목을 매었으나 다른 이들에 의해 발견돼 구해졌다. 이후 두발을 자르고 미친 척하니 천덕의 부친도 혼인을 강요할 수 없었다.

부친에 대한 효성도 지극해 곽지 사람들은 그의 효성에 감복했다.

선조 때 제주판관 조인후(趙仁後)가 제주목사 임진(林晋)에게 김천덕의 효열(孝烈)을 알리자 마침 제주에 왔던 아들 임제(林悌)김천덕전을 지어 목사가 조정에 보고했다. 이로써 1577년에 가문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김치부金致富1921(일제강점기)~?, 재일교포 사업가, 호 연정(蓮淀).

제주시 연동 -에서 태어나 오사카(大阪) 덴노지구(天王寺區) 우에혼마치(上本町)에 살았다. 재일(在日) 경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향리인 연동 마을에 전화(電化) 사업을 추진하고, 새마을회관 건립을 추진했다.

제주종합경기장에 연정(蓮錠)정구장을 시설하고, 앞에 그의 흉상(胸像)을 건립했으며 해마다 연정기(蓮錠旗) 쟁탈 제주도정구대회를 개최토록 했다.

제주컨벤션센터 건립 오사카지구추진회와 관서(關西)지방 제주도민회 고문으로 있었다.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과 체육훈장 거상장을 받았다.

김치용의 교지.
김치용의 교지.

김치용金致鏞1832(순조32)~1901(광무5), 한말의 서당 훈장, 일명 치용(致用), 자 순소(舜韶) 혹은 중녀(仲汝), 호 신암(薪菴). 본관 나주.

제주시 영평리 가시나-에서 태어났다. 1874(고종11) 증광(增廣) 생원시험에 합격해 이로써 가시(嘉時·현 영평)마을 김창국의 대지 위에 김치용 공덕비를 세워 그의 높은 뜻을 기렸다.

김치용은 유교 중흥에 뜻을 두었다. 1874년 대원군의 신미훼철(辛未毁撤)에 의해 본도에도 삼성사, 귤림서원, 영혜사(永惠祠), 향현사(鄕賢祠), 송죽사(松竹祠), 의사묘(義士廟) 등의 모든 제향을 철폐됐다.

이에 제주 유림의 지도자 고성겸(高性謙), 이응호(李膺鎬) 등의 반대와 슬픔은 대단했다. 1875년 봄, 김치용은 귤림서원 터(오현단)에 경신재(敬信齋)를 창설해 유사(儒士)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는 유림들을 움직여 특히 귤림서원만은 복원하고자 했다. 귤림서원은 본시 장수당(藏修堂) 터전으로 오랫동안 본도 교학의 요람이었다

유림들은 당시 목사 이희충(李熙忠)에 건의해 경신재를 창설, 본도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국립 교육기관인 향교와 겨루고자 했다.

김치현金致鉉1932(일제강점기)~1978 해병 준장, 해병(海兵) 1상륙사단 부사단장 겸 제2훈련단장, 본관 김해.

아버지 김철희(金喆禧)과 어머니 김추월(金秋月)의 차남으로 한림읍 한림리 -수풀에서 태어났다.

1950년 한림중학교 제3학년 당시 6·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자원해 해병대(海兵隊) 4기생으로 출전했다. 인천(仁川) 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 등 수많은 전투를 겪었고 25여 회의 각종 훈장과 표창장을 받았다

월남(越南)전에도 참전,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장교에 이어 이 돼 사병 출신 장군으로서 온 신망을 모았다.

1978617일 해병제1상륙단 부사단장 겸 제2훈련단장인 그가 과로로 급서순직(急逝殉職)했다.

그가 타계하자 후배 해병 장태언(張泰彦·곽지)은 조사에 멀리 떠나는 길손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종적(蹤迹)을 남기는 법, 문득 한 톨의 먼지는 태양의 빛을 받아 찬연히 빛나는 존재를 뽑아내는 법이다. , 고난을 짓씹으며 어기찬 끈기는 그대 떠난 다음에도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메아리로 맴돌고 있으니 . 우리들 3·4기 전우들은 참전록(參戰錄) 한 모서리에 임의 사진을 내걸고 없는 빈자리를 메꾸려 하나니. 여기 유족(遺族)들의 이름을 적어 빔과 동시에 그 두고 온 산야(山野)에 자유와 통일이 하루바삐 찾아오기를 손 모아 빈다고 했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제1장군묘역에 안장(安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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