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과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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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논설위원

필자는 오래 전 유럽 미술관 탐방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다녔던 미술관을 떠올리면서 “그 미술관의 걸작은 뭐였지?”라고 다시금 반문해 본다. 스페인 프라도미술관에는 루벤스의 <시녀들>,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 있었고,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에는 앵그르의 <샘>,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밀레의 <만종>이 있었다. 루브르박물관에는 다빈치의 <모나리자>,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등 쟁쟁한 화가들의 걸작이 있었다.

세상에 화가는 많아도 걸작을 탄생시킨 화가는 드물다. 물론 화가에게는 대표작이 있다. 일생 동안 수많은 작품을 그렸기 때문에 그 중 대표작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화가 자신이 생각하는 대표작이 곧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은 화가가 살았던 시대상과 정서를 투영하며, 화가 개인적 경험을 통해 발현한 미의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이런 작품은 시공을 넘어 후대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있다.

고야의 학살에 대한 고발정신은 쿠르베에게 미술의 정치성을 갖게 해 리얼리즘 미술의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앵그르와 마네의 파격미는 경직된 아카데미즘을 뒤흔들었으며, 밀레의 소박한 노동미는 농촌생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들라크루아는 오리엔탈리즘의 제국주의적 관점도 보여주었지만, 시민들의 저항정신을 불어넣어주기도 했다. 루벤스의 걸작은 피카소에게 새로운 창의적 모티프가 돼 새로운 걸작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걸작과 명품 미술관은 하루아침에 이루지지 않는다. 유럽 미술관들은 제국주의를 운영하며 막강한 권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걸작을 소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작품 구출작전을 벌이면서 걸작을 지켜냈다. 일찍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며 예술 발전과 관리에 힘을 쏟고, 대저택을 예술가의 창작실로 내놓았던 독지가가 있었다. 저택을 작품으로 가득 채우고는 유언을 통해 국가에 헌납하는 이도 있었다. 미술관을 화가들의 창작을 위해 개방했으며, 예술가의 생계를 보장하고 스튜디오를 저가로 임대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자기 마을에 예술가가 살고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우리나라에 서양미술이 들어온 지 100년 쯤 되었다. 그것도 일제 식민지를 겪으면서 일본인의 눈으로 여과된 서양미술이 수입된 것이다. 미술관 또한 대중화된 지 오래지 않았고 개관 50년이 넘는 미술관은 그리 흔치 않다. 특히 우리나라 미술관의 소장품 규모는 작고, 기부나 기증 문화도 활발하지 않다.

21세기는 창의적 문화가 우선시되는 예술의 시대다. 문화예술은 우리 삶에서 마음의 위안과 생의 기쁨을 안겨주는 가장 고귀한 분야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많은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문화예술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다. 이유는 많겠지만 예술교육을 소홀히 한 부작용일 수도 있고, 어려운 시대를 겪었던 시대 경험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부족도 있겠다. 걸작과 미술관 관람객수는 비례한다. 걸작이 많아지면 관람객의 발걸음도 활기찰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문화예술 분야는 공연과 전시 등의 취소로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문화예술인에 대한 대책 또한 미미하다. 문화예술이 뒤떨어지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 명품 미술관의 탄생은 예술가들에 대한 부단한 창작 지원과 작품 유통에 대한 과감한 투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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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경 2020-07-13 09:52:09
<시녀들>은 루벤스가 아니고.. 벨라스케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