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로 다가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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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연동 한 아파트 단지다. 1,2차를 합하면 12동, 어림해 7백 몇 가구가 들어선 곳. 한 가구에 셋을 셈해도 이곳 인구가 2,3천 명에 육박할 것이다. 시골로 치면 작잖은 마을 하나다. 아파트는 작은 땅에 최대의 주거공간을 확보한 걸작품으로, 만물의 영장다운 기획물이다. 땅에 대한 지분은 단독 주택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독립된 한 개인 명의의 땅이 없으니 입주자는 어중간한 주인인 셈인가.

13층 베란다에서 창밖을 내다본다. 똑같은 창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을 뿐 눈길을 끄는 색다른 무늬 하나 없어, 무미건조하다. 누가 그렸는지 참 멋쩍게 그렸다. 어느 한구석 둥근 데라곤 없는 모나고 각진 구도로 가득 메웠다. 언제 봐도 웃을 줄 모르는, 표정 없는 무뚝뚝한 시멘트 구조물이다.

달포 전 이곳 아파트로 이사했다. 아들네의 강제(?)로 운신했지, 아파트는 취향이 아니다. 더군다나 서른 해를 눌러산 읍내 집을 떠나기가 무척 힘들었다. 몸소 키운 나무들과 쌓은 정리를 두고 차마 돌아서지 못해 멈칫거렸다. 격의 없이 지내던 이웃과의 작별도 아쉬웠다. 섬을 떠나는 것도 아닌데, 아주 헤어지는 것 같아 상당히 서운했다. 그분들은 이삿짐을 쌀 때부터 임지에 와 풀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아 제주 인심이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나이 들어 한 손이 아쉬웠다. 세밀하고 따사로운 배려를 떠올리면 콧마루가 시큰해 온다.

내가 살았던 시골이 자연이라면 이곳 아파트는 문명이다. 갑자기 도농의 차이가 확연히 다가온다. 잔디마당이 있던 집에서 나무 한 그루 내 것이라곤 없는 아파트로의 이사는 당혹스러울 만큼 낙차가 커 낯설다. 주거 환경뿐 아니다. 걷기운동을 하며 매일 마을을 가로질러 만세동산에 닿던 한적한 그 길, 드림타워가 지척 간인 이곳 도심은 서울이란 착각이 들게 번잡하다. 푸른 달빛이 내려앉는 아늑한 밤을 지나 해 이글거리는 백주의 뜨거운 길바닥 위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다.

한 벽체로 맞댄 이웃 호와 아직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식솔이 환을 겪는다는데, 섣불리 나서지 못한다. 한번은 한 젊은 여인이 엘리베이터를 내리며 다소곳이 고개 숙여 예를 표하는 게 아닌가. 아뿔싸, 가벼이 눈길을 건네면 좋았을 것을, 그만 촌티를 내고 말았다. 순발력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인으로 세련되지 못한 민낯을 드러냈으니 객쩍었다. 오가며 먼저 가볍게 목례를 보내리라.

아내가 경비실에 들러 입주 인사를 하고 왔단다. 미화원 아주머니들과 함께 국수나 한 그릇 사 드시라 미성(微誠)을 전했다는 것. 이사하느라 바쁜 와중에 그런 생각을 했으니.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주었다.

쓰레기 수거 문제가 만만찮다. 엄격히 종류별로 지정된 요일을 따르고 있다. 저쪽에선 요일 불문으로 다소간 마구잡이라 편했는데, 문화가 다른 딴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다. 병, 스티로폼, 플라스틱, 철제 재활용품은 일요일에 지하로 내려가 처리해야 한다. 함부로 하던 버릇을 고치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할 판이다.

걷기 코스를 탐색 중이다. 숲이 울울해 그늘을 밟고 걸을 수 있는 길이 잡혔다. 길게 벋은 직선에 걸맞게 굽은 곡선의 길이 잇대 있어 끌린다. 걸으면서 몸이 운율을 타게 되면 시나브로 사유의 촉도 잡혀가리라.

자꾸 살던 곳이 떠오르지만 이젠 이곳에 와 있다. 아파트로 다가앉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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