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고백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전옥선 수필가

엄마가 꽃을 이렇게까지 좋아하시는 줄 정말 몰랐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선물로 받은 수국의 근황을 알려준다. 볕이 너무 뜨거워서 시들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꽃이 더 곱다. 아침에도 물을 줬다.

수국을 중간에 두고 엄마와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통화를 한다. 새로 바뀐 휴대폰으로 사진은 찍었지만 보내는 게 익숙하지 않아 노심초사하다가 기어코 여동생의 집으로 가서 사진을 전송하셨다.

올해 팔순이 된 엄마를 축하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였다. 코로나19로 걱정이 되긴 했지만 더 이상 미룰 수만은 없었다.

엄마는 줄게 있다며 가방 안에서 검정 비닐봉투를 하나 꺼내 놓으셨다. 궁금해하며 속에 싼 종이를 펼치자 야무진 구근들이 튀어나온다.

지난해 봄, 엄마의 작은 꽃밭에 핀 튤립을 보고 예쁘다고 감탄했더니 마음속에 담고 계셨나 보다. 비 맞히지 말고 보관했다가 가을에 심어라 하신다.

실내를 피해 식물들이 있는 공원으로 모시고 갔더니 때마침 부겐빌레아꽃이 한창이다. 엄마는 참 곱다며 꽃 속에서 환하게 웃는다.

동생들은 그 모습이 예쁘다고 감탄하면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휴대폰 화면 속으로 선홍빛 꽃송이들이 밀려든다. 엄마의 이마 위로 붉은 꽃 한 송이가 내려앉았다.

할머니는 작은아버지의 사업자금을 위해 밭을 팔자고 하셨고, 엄마는 완강히 거부했다. 아버지가 군대에서 다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와 구입한 땅이었다. 그 땅에 여덟 식구의 생계가 걸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들고 있던 곰방대를 내던졌다. 엄마가 밭을 포기한 것은 이마 위로 흘러내리던 피가 무서웠던 게 아니라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었다. 형 노릇을 할 수 없다면 살아서 무엇 하겠냐며 강 쪽으로 휘적휘적 가시던 아버지. 엄마는 기어코 두 손을 들고야 말았다.

한창 공부해야 할 아이들이 넷이나 있는데, 농토 하나 없는 시골 생활은 늘 궁핍했다.

조부모는 큰손녀인 나를 유난히 귀하게 여겼고, 아버지도 나를 응원했지만, 엄마는 큰아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내가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하자 매를 들기까지 했다. 막냇동생은 큰누나가 공부하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매를 맞는 걸 보고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싱겁게 웃곤 했다. 자취생활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힘들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어쩌면 그 시기를 잊고 싶은 방어기제가 작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살기 위해 잊고 사셨을까. 이마가 찢겨 피를 흘렸을 때의 아픔을. 남편이 잘못될까 봐 땅을 포기했을 때의 절망감을.

엄마에게 나는 살가운 딸은 아니었지. 힘들다는 투정도 자잘한 일상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지. 엄마는 그런 큰딸을 대하기 어렵노라고 지인에게 털어놓기까지 하셨다. 엄마의 눈물을 본 적도 없고, 고되다는 넋두리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니, 곁을 내어드린 적이 없었다.

사위의 사고 소식을 뒤늦게 알고는 한참을 울었다는 엄마. 괜찮다고 다독거려줄 사람도, 눈물을 닦으라고 손수건을 내미는 사람도 하나 없이 홀로 울었다는 고백을 여든이 돼서야 하신다. 엄마의 딸이 힘들 때마다 저렇게 우셨을 테지.

수국이 가득한 곳으로 엄마를 이끌었다. 아이고, 예쁘다. 나는 꽃이 참 좋더라. 수국 앞에서 소녀처럼 웃는다. 엄마, 여기서는 도채비꽃이라고 불러요. 피고 질 때까지 색깔이 여러 번 변하는 도깨비 같은 꽃이라고.

닷새 동안의 가족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 결이 고운 친구가 엄마 드리라면서 수국을 선물했다. 엄마는 이파리가 다치지 않도록 종이로 감싸고 손수건으로 가볍게 묶어서 가지고 가셨다.

휴대폰이 경쾌하게 울린다. 수국꽃 위로 보라색 별들이 가득 내려앉아 있다. 나도 휴대폰 속의 앨범을 열어 꽃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을 찾아 전송한다. 엄마는 알고 계실까.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