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첫 제주출신 외과의사…현대의술 개척한 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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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칠순, 조천보통학교 교직생활
 김태근, 함덕청년회 항일 운동
 김태능, 가파도 신유의숙 교사
 김태문, 6·25 공훈…훈장 추서
 김태민, 청년 규합해 독립운동
 김태생, 청구문화상 수상 작가
일제강점기 때 전라남도립제주의원 현판 앞에서 의사와 간호사, 직원들이 모여 기념 촬영한 모습. 도립제주의원은 자혜의원으로 발족해 1927년 전라남도립제주의원으로 개칭됐다. 김태민은 1913년 4월 11일 제주 자혜의원 조교로 임명받았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일제강점기 때 전라남도립제주의원 현판 앞에서 의사와 간호사, 직원들이 모여 기념 촬영한 모습. 도립제주의원은 자혜의원으로 발족해 1927년 전라남도립제주의원으로 개칭됐다. 김태민은 1913년 4월 11일 제주 자혜의원 조교로 임명됐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태근金泰根1911(일제강점기)~1948(미군정기). 함덕청년회 항일 활동. 본관 김해

김주봉(金柱奉)의 차남으로 산북 함덕리에서 태어났으며 혁명적 농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김원근(金元根)의 아우이다

광복 후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얼마 있지 않아 동년 1110일 산북 조천면 교래(橋來)리에서 의문사를 당했다.

조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몇 차례 일본을 왕래한 바 있다. 고향에 있을 때 그는 부생종(夫生鍾), 김두성(金斗性)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고 이어 함덕청년회에 가입했다. 19344월 동리 송건호(宋健浩) 등 사회주의 운동가의 영향을 받아 독서회 활동에 참여했다

194111월 잡화상을 하던 김태근은 조선에서 지원병을 모집하는 것은 일본이 전쟁에서 불리하기 때문이다라고 해서 피검됐다. 19411027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소위 육군형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6월형을 선고받았다.

조천초등학교 정문 우측에 세워진 김칠순 장학기념비.
조천초등학교 정문 우측에 세워진 김칠순 장학기념비.

김칠순金七順1911(일제강점기)~ 1938. 여성 교육자. 본관 김해. 조천리 출신

서울에서 유학해 숙명(淑明)여고보를 졸업, 1934년부터 모교인 조천보통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앞으로의 세대는 여성의 역할이 중요함을 늘 강조해 큰 감명을 주었다

19373월에 그녀는 의병퇴직(依病退職)하게 되고 익년 운명(殞命) 직전에 유언하되 나는 일금 500원을 모교에 쾌척하니 이 돈으로 아동문고(兒童文庫)를 설립, 후진 육성에 보태고 특히 여성교육에 활용해 달라라고 했다.

그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당시 거금인 이 희사금으로 기념사업이 이뤄져 모교뿐 아니라 전도에 걸쳐 흠모(欽慕)의 대상이 됐다.

김태능金泰能1906(광무 10)~1972. 향토사학가. 호는 춘송(春松). 본관 경주

대정읍 가파도 겔파-에서 태어나 서울로 올라가 휘문(徽文)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 무렵 역사 담당 은사 김도태(金道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도태는 민족주의 의식이 강한 교육자로서 우리 국사를 바로잡는 데 크게 공헌한 분이다.

숙부 김성숙(金成淑)이 가파도에 개설한 신유의숙(辛酉義塾)에서 5년 동안 교사로 재임했다. 이 의숙은 민족주의 교육의 온상지라 해서 일제로부터 늘 감시를 받았다.

해방 후 만학으로 부산대학교 법정대에서 2년을 마친 후 한때 해난(海難)구조회사에서 일했고 임산업(林産業) 등 사업에도 종사했으나 여의치 않아 그만뒀다.

한때 재경(在京) 제주도민회 간사장을 역임했다. 서울에서 타계하기까지 제주사에 관계되는 논문 63편을 발표, 저서로 제주도사론고가 있다

김태문金泰文1929~1952. 구좌읍 한동리 태생. 1941년 구좌중앙국민학교 졸업.

도일해 1945년 오사카 테이츠카(帝塚)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 195010월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5사단 27연대 제9중대장으로 전보돼 부하를 지휘하던 351고지 요충지에서 1952119일 밤 950분부터 포격과 사격이 시작되면서 통신이 두절됐다.

19521120일 대위로 특진함과 동시에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됐다. 고향 주민들은 이를 기리기 위해 한동초등학교 울타리 안에 흉상을 건립해 애국심을 고양시켰다.

김태민金泰玟1888(고종25)~1965. 자혜의원 조교. 의사. 장춘(長春)병원 개업. 제주청년연합회 회장. 일명 김원백(金源栢). 호 아단(我丹) 혹은 인당(忍堂). 본관 경주.

제주시 삼도리 제주-성안에서 한학자인 농산(農山) 김홍석(金洪錫)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3년에 국내 유일의 의전(醫專)인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 제주인으로서 제1호의 정규 외과의사자격증을 획득했다.

1913411일 제주 자혜의원(慈惠醫院도립병원 전신)의 조교로 임명받아 현대의술을 익혔고 191510월 의사면허를 받아 3도리에 장춘(長春)병원을 개업했다. 더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서 4년 동안 연구하고 수련했다.

김태민은 1925923일 갑자의숙(甲子義塾) 강당에서 제주청년연합회가 조직될 때 회장에 당선됐다. 가입 청년단체는 가파청년회, 온평청년회, 서귀포청년회, 함덕청년회, 신촌청년회, 제주청년회 등이었다. 이 단체의 주요 임원들은 당시 본도에서 활동하던 진보적 인텔리 청년들이었다.

실은 이보다 1년 전에 제주 성내의 각 청년 단체 즉 제주수양회, 탐라협회, 교풍회(矯風會) 등을 통합해 제주청년회를 결성, 조선 민중 해방운동의 선구자가 되기로 했다. 18세 이상 40세 미만의 신진 청년들을 결집한 그는 초대 회장이 됐다.

그가 제주 성내에서 장춘의원(長春醫院)을 개원하자 외과의(外科醫)로서 인기가 대단했다. 그의 뒤를 이은 김유돈(金有墩), 고명우(高明佑)도 경성의전을 졸업했다. 이들을 현대 의술을 개척한 초기 삼대 명의라고 일컬었다.

김태생金泰生1924(일제강점기)~1986. 재일교포 소설가. 사이다마현(琦玉縣) 문학학교의 강사. 12회 청구문화상(靑丘文化賞) 수상. 본관 광산.

대정읍 신평리 옹기-에서 태어났다. 일본으로 건너갔던 김태생의 부모는 관동대지진 이후 한국인에 대한 핍박과 차별이 심해지자 1923년에 귀향했다

이듬해에 김태생을 낳았는데 그의 부친은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고 모친은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1930년 친척에 의해 5세까지 길러진 후 일본에 있는 아버지 곁으로 갔다. 이 다섯 살까지의 유년기 체험이 김태생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68년에는 폐결핵으로 입원, 8년 동안 요양생활을 하고 폐를 수술하기도 했다.

1972골편을 발표할 때부터 타계한 1986년까지의 작품집 골편(骨片·1977)’, ‘나의 일본지도(1985)’, ‘나의 인간지도(1985)’, ‘나그네 전설(1985)’ 등을 출간했다. 1985년에 제12회 청구문화상(靑丘文化賞)을 수상했다.

김태생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어렵게 소설가로 입신했고 일본어로 소설을 짓는 문장가로 성공했다.

그가 죽은 후 일본 잡지 기록에 그의 추모 특집이 이어질 정도로 그의 소설은 유명했다. 그는 소설가로서 성공해 우리의 국위를 선양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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