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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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창, 신학박사·서초교회 목사

심한 고통과 좌절 중에 있는 자녀가 부모에게 반항적으로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왜 나를 낳으셨나요?” “왜 저를 이렇게 키우셨나요?” 그렇게 ‘왜’를 외치는 질문은 어떤 답을 찾으려는 탐구적 의도의 질문이 아니라, 분노와 반항과 절망의 신음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외치는 자녀나 질문을 받는 부모나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왜’, ‘왜’를 외치는 동안에 외치는 자녀는 점점 더 깊고 어두운 늪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반항하며 방황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생기게 된다. “이런 나 때문에 우리 엄마가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이런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그 반항적인 ‘왜’는 점점 줄어들게 되고 사라져 가게 된다. 나의 고통만 생각하면서 가족을 고통스럽게 만들어온 자신을 깨닫는 순간 아이의 영혼은 전혀 다른 새로운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고통을 강요하거나 허용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자녀를 위해 끊임없이 고통당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부모인 것이다.

1914년에 1차세계대전이 일어났고, 1939년에 2차대전이 일어났다. 1차대전이나 2차대전 모두가 유럽에서 일어났다. 1차대전과 2차대전의 희생자 수를 합하면 1억은 훨씬 넘을 것이라 한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유럽은 처참하게 버려진 듯한 분위기였다. 2차대전 직후 유럽의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는 연극 대본을 본 적이 있다. 연극배우가 고통스럽게 외치는 이런 독백이 있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여! 그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 많은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그렇게 죽어갈 때, 구약성경을 소중히 여기던 그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 중에 죽어갈 때, 사랑의 하나님이신 당신께서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당신은 아직도 사랑의 하나님이신가요?”분노하며 항의하는 듯한 연극대사를 본 적이 있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엄청난 고통이 주어진 것인가?” “왜! 이런 엄청난 전쟁이 그것도 두 번씩이나 연거푸 주어진 것인가?” ‘왜’ ‘왜’ ‘왜’를 외치는 연극과 문학과 영화들이 전후의 유럽에서 수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왜’를 외치는 질문에 대한 만족할 만한 대답은 찾아낼 수 없었다.

그렇게 ‘왜’를 외치던 유럽의 많은 지성인들은 반항적이고 냉소적이며 무신론적인 휴머니즘의 길을 거침없이 걷기 시작했다. 2차대전 이후 유럽의 정신세계는 전반적으로 신앙과 희망의 반대편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로 ‘왜’를 외치는 방식으로는 더 차갑고 어두운 방향으로 갈수 밖에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되새기고 싶은 것이다.

“3차세계대전과도 같은 코로나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언론이나 종교, 사회 전반이 깊이 생각하기 시작해야 할 시기라 생각된다.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이야기들은 지성의 차가운 멋을 느끼게 해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왜’ ‘왜’하는 함성은 절제하면서, 그렇게 소리지르다가 돌아선 아이들의 이야기와 같은 글들이 필요하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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