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가 왕자 잉태 빌었다는 곳…현재 석탑만 남아
기황후가 왕자 잉태 빌었다는 곳…현재 석탑만 남아
  • 제주일보
  • 승인 2020.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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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원당봉 봉수터와 불탑사
작은 봉우리 망오름에 봉수대
해안 감시 용이하고 등반 쉬워
원당사지 5층석탑 있는 불탑사
기황후 등극 즈음에 창건 추정
元 왕족 터잡은 곳으로도 유명
원당봉에 있는 세 개의 절 불탑사와 원당사, 문강사로 들어가는 길. 이 중 불탑사에는 제주에 하나밖에 없는 고려시대 불탑이자 전국에서 유일하게 현무암으로 세워진 ‘원당사지 5층석탑’이 있다.
원당봉에 있는 세 개의 절 불탑사와 원당사, 문강사로 들어가는 길. 이 중 불탑사에는 제주에 하나밖에 없는 고려시대 불탑이자 전국에서 유일하게 현무암으로 세워진 ‘원당사지 5층석탑’이 있다.

원나라의 사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는 원당봉은 해안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길게 뻗은 오름이다

멀리서 보면 3개의 봉우리로 보이는 원당봉은 실제로는 7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연유로 삼첩칠봉(三疊七峰) 또는 원당칠봉이라 불린다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원당봉 일대를 걸어보고 이 일대에 얽힌 일화들을 알아본다

삼첩칠봉 원당봉과 망오름 원당봉수

망오름, 도산오름, 앞오름, 펜안오름, 동나부기, 서나부기, 논오름 등으로 이루어진 원당봉은 행정구역 상 제주시 삼양동에 속하지만, 동쪽 사면은 조천읍 신촌리에도 걸쳐 있다

원당봉에는 삼나무, 소나무, 비목나무, 예덕나무, 보리수나무 등으로 이뤄진 울창한 상록활엽수림이 한 여름에 그늘을 드리워 방문객들을 사시사철 끌어드린다. 최근에는 원당봉 둘레길 조성으로 더욱 많은 주민들이 원당봉을 찾고 있다. 특히 11일에는 새해를 이곳에서 맞이하려는 수천 명의 인파로 색다른 장관을 이룬다.

원당봉에는 해발 170m의 주봉과 94m의 작은 봉우리도 있다. 원당봉수대가 있던 망오름은 남쪽에 있는 주봉의 정상부에서 500m 떨어진 북쪽 바닷가에 있다. 대체로 봉수대는 봉우리 정상에 축조되는데, 정상과 많은 높이차가 있음에도 북쪽의 작은 봉우리에 봉수가 있는 것은 지형적으로 해안을 감시하기가 용이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쉽게 오르내릴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봉수터로 추정되는 망오름 지역은 거친 숲으로 덮여 있다. 그래서 사람의 왕래가 많은 원당봉 서쪽 정상 한 켠에 원당봉수대터표지석을 세운 듯하다. 다음은 표지석 내용이다

원당봉수대터 : 조선시대 위급을 알리던 원당봉수대 터. 도내에는 25개의 봉수대와 38개의 연대 등 모두 63개소가 설치돼 유사시의 통신수단으로 이용됐다. 이곳에서는 동쪽으로 서산(함덕 서우봉)봉수대, 서쪽으로 사라봉수대와 교신했다. 평시에는 한 번, 적선이 나타나면 두 번, 해안에 접근하면 세 번, 상륙 또는 해상 접전하면 네 번, 상륙 접전하면 다섯 번 봉화를 올렸다.’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호이자 보물 제1187호로 지정된 원당사지 5층석탑.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호이자 보물 제1187호로 지정된 원당사지 5층석탑.

불탑사와 원당사지 5층석탑

원당봉에는 불탑사와 원당사 그리고 문강사 라는 세 절집이 있고, 불탑사에는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호이자 보물 제1187호로 지정된 원당사지 5층석탑이 있다. 4·3사건 등 수많은 사연으로 땅에 묻혔다 다시 복원된 5층석탑은 제주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고려시대의 불탑이며, 전국적으로도 현무암으로 세워진 것으로는 유일한 불탑이다.

현무암으로 쌓은 원당사지 5층석탑은 1층의 기단과 5층의 몸돌이 좁은 것, 1층의 남쪽 면에 감실(불상을 모셔 두는 방)이 있는 점이 매우 독특하다

당시 원당사로 불렸던 불탑사는 고려공녀로 원나라에 끌려갔던 기황후가 1340년 제2의 황후로 등극한 즈음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653(효종 4)까지 절이 유지됐으나 1702(숙종 28) 배불정책으로 훼손됐다.

원당사의 창건설화에 의하면 원나라 황제인 순제가 대를 이을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어느 날, 꿈속에 한 스님이 북두의 명맥(命脈)이 비친 삼첩칠봉의 터를 찾아 절과 탑을 세우고 기도하면 태자를 얻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기황후는 온 천하를 살피던 중 탐라(영주)의 동북 해변에서 삼첩칠봉을 찾아 탑과 큰 사찰을 세우고 정성껏 기도를 드려 태자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3차례의 화재로 무너진 절을 1914년 안봉려관 스님이 보수해 원당사에서 불탑사로 이름을 고쳐지었다. 불탑사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의 내용을 아래에 옮긴다.

元堂寺址: 원제국시대 제주도의 3대 사찰(하원 법화사, 외도 수정사)의 하나였던 원당사터이다. 13세기 말엽 원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보이며 원나라 기황후(奇皇后)가 삼첩칠봉의 명당자리에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기 위하여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17세기 중엽까지 존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1914년 이곳에 불탑사가 재건되었다. 지금도 경내에 당시 세웠던 오층석탑이 보물 제1187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원당봉 주변에 터 잡은 원나라 왕족

원당봉은 품 안에 다양한 생태와 사람들을 품고 있는 수호신 같은 오름이다. 분화구와 용암 유출구에는 크고 작은 3개의 구릉이 형성돼 있는데, 이것이 북두칠성의 명맥인 3()7()이다. 겹치는 봉오리마다 세 개의 절이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원당사는 불타 없어졌으나, 당시 세워진 5층석탑만은 모진 세월의 화재 속에서도 살아남아 찾아오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또한 원당봉에는 진시황이 보낸 사자들이 불로초를 찾으러 들렀다는 전설도 있다. 37봉이 있는 곳에 불로초가 자란다는 믿음 때문일 게다.

이곳 주변은 오래전부터 유배인이나 원나라 왕족들이 터 잡은 곳으로도 알려졌다. 원나라 시대 중국에서 제일 큰 성 중에 하나인 운남성의 왕은 양왕(梁王)이었고, 그의 아들은 박박태자라고도 불리는 백백태자(伯伯太子)였다. 신흥국인 명나라에 쫓긴 원나라의 양왕은 1381년 중국 보령으로 달아나 자살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백백태자는 아들 육십노와 내시 복니 등을 데리고 1382년 탐라로 피난해 왔다.

원나라의 멸망으로 명나라에 귀순한 달달친왕에게 명의 태조는 제주에 거주하도록 명하니, 1388(우왕 14) 그는 80여 호를 동행해 제주로 들어왔다. 같은 해에 전리판서(典理判書) 이희춘을 제주로 보내 그들이 살 집을 수리해 거주하게 했다. 이는 명 황제의 뜻에 의한 것이다

탐라에서는 이들을 우대해 대촌현(지금의 제주시) 동쪽의 원당봉 북쪽 자락에 복거(卜居)하도록 했다

1393년에는 양왕 자손인 애안첨목아 등 4명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백백태자는 1393년 말 3필과 금가락지를 조선 조정에 바쳤다. 이에 조선에서도 화답해 1395년 백백태자에게 쌀 400곡과 저마포 30필을, 양왕 손자에게 쌀과 통 100곡과 저마포 10필을 하사했다.

1404년 백백태자가 죽자, 1444년 조정에서는 백백태자의 처가 연로한데다 빈궁해 불쌍하니 제주로 하여금 매년 의복과 양식 등을 공급하도록 했다. 더구나 세종은 사위 임울에게 군역을 면제시켜 오로지 봉양만을 맡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오늘날의 원당사 유적도 이들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탐라에 유배가 시작된 것은 14세기 초 원나라와 관계가 깊다. 1273년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를 평정한 후 원제국은 병력을 철수하지 않고 달로화적총관부를 둬 탐라를 직속령으로 삼았다. 이후 탐라는 100년간 원의 지배에 들어갔다.

원은 다른 나라의 왕족이나 권신 등 국내에 두기가 곤란한 인물들을 제주도에 유배했다. 1317년 위왕 가가목을 시작으로 1322년 휘정원사 나원, 1340년 석란해대왕을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이후에도 도적과 범죄인 등 모두 170여 명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이러한 유형(流刑) 제도는 원이 멸망한 후에도 명나라에 의해 답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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