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름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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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선 수필가

거실 문갑 위에 형상석 한 개가 자리하였다. 회색빛이 나는 둥근 돌에 사람의 얼굴처럼 눈과 코가 검은색으로 박혔다. 누가 그려 넣은 것도 아닌데 입술의 위치는 약간 비뚤어져 있다. 어찌 보면 못난 얼굴이 뭉크 같기도 하고 걱정 인형을 닮았다. 좌대에 앉히고 보니 얼굴을 내민 듯하다.

제주시 탑동 바다 수면이 매립될 즈음이다. 탑동에 살던 고등학교 은사님은 평소 모아둔 먹돌을 나에게 주려고 오라 하였다. 일 층 현관 입구에 검고 푸르스름한 먹돌이 수두룩이 있다. 모나지 않아 둥글고 타원형의 돌이 많다. 수많은 오() 석 중에서 색깔도 유난히 회색인 돌이 눈에 띄었다. 회색 바탕에 검은색이 박힌 모양이 눈에 띄어 먼저 내 손에 잡혔다. 못생겨도 누군가에게 말하는 듯하다.

모여 있는 먹돌을 바라보았다. 짜르륵 거리며 탑동의 파도가 먹돌 사이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파도 소리에 이어 썰물이 되면 사진가는 양질의 먹돌이 수두룩한 이곳을 즐겨 찾았다. 파도가 누워 버리면 모여 있던 바람은 어디로 도망갔나.

이 먹돌을 가져다가 무엇을 할까. 윤기 나면서 둥글둥글하여 어디에 두어도 잘 어울릴 듯하다. 은사님은 스무 개 정도를 가져간 지인이 실내정원을 꾸몄는데 좋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지금은 매립 공사 중이어서 사라질 먹돌은 세월이 흐른 후 보물이 될 것이라 하였다.

먹돌은 무거웠다. 은사님과 나는 양손에 먹돌 가방을 들고 자동차 뒷좌석으로 옮겼다. 사람 무게보다 더 나가는지 뒷자석이 내려앉는 느낌이다. 아파트 현관 앞에 자동차를 세우고 여러 번에 걸쳐 엘리베이터까지 이동하였다. 두 사람이 움직였던 먹돌을 혼자서 앞 베란다까지 옮기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실내 정원은 어떻게 꾸며 볼까. 두꺼운 비닐을 두 겹으로 겹쳐 놓고 에스 곡선으로 꾸며 봐야겠다. 금붕어 몇 마리도 사다 놓고 수초도 넣으면 좋겠다. 높이가 다르게 세워질 나무토막도 사야 하겠고 흙은 몇 포대나 옮겨올까 구상하였다. 먹돌로 경계 삼거나 장식할 생각이다. 층층이 진 조그만 실내정원을 꾸미려고 꿈에 부풀었다.

그중에서 먹돌 두 개를 골라내야 하겠다. 장아찌도 누름돌로 잘 눌러야 숨을 죽이고 삭힌 발효의 맛을 드러낸다. 여름철 입맛 없을 때 물밥에 얹어 먹으면 군침 도는 밑반찬이 된다.

한 달이 지났다. 주말에는 손을 보려고 작정하던 중이었다. 거실 사이 문을 열어 보니 무언가 허전하였다. , 어디로 갔지. 분명히 이곳에 두었는데 어디로 갔을까.

베란다에 놓아둔 먹돌 어디로 옮겼나요?” “ 돌이 많아서 베란다가 눌러질 것 같아 화단에 버렸지.”

얼마 전, 매끈하고 예쁘장한 돌이 몇 개 화단에 있어서 어디서 본 듯하다고만 여겼다. 다음날 내려가 보았더니 하나도 없이 사라졌다. 바로 그 먹돌이었다.

갑자기 내 꿈은 사라졌다. 누름돌 한 개만이라도 남겨두었으면 살림에 유용하게 썼을 터인데 아쉽다. 옮겨오며 무겁던 아픔만이 가슴을 억누른다.

썰물이 되면 탑동 바닷가에 먹돌이 펼쳐졌던 일이 엊그제 같다. 유난히 밑바닥이 납작한 돌 틈 사이에 많았던 고동도 잡을 수 없다. 석양이 돌에 비치면 반짝반짝 빛이 났던 시절도 망각곡선이 된다. 바람은 머물지 않고 성난 파도가 되어 회오리친다.

이젠 사라진 먹돌이 그립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은사님을 추억할 유일한 형상으로 남았다. 지금까지 문갑 위에서 때로는 걱정 인형처럼 말한다. “미선아, 오늘 힘들어도 밝은 내일이 있잖아.” 웃으며 나를 버티게 하여 주는 얼굴이다.

본래 누름돌은 내 물건이 아니었기에 욕심내는 마음도 버리라 예시한다. 번뇌와 집착이 일어나더라도 누름돌처럼 숨을 죽이고 꼭꼭 누르며 살라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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