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해조물 무역상 횡포 견제…약자 편에 섰던 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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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안, 사회주의 조직서 항일
 김태연, 일본 넘어가 독립운동
 김태윤, 제주변호사회 회장 역임
 김태준, 경로당 건립 부지 쾌척
 김태현, 인수당 한약방 설립자
 김태호, 사숙 개설해 인재 배출
제주 해녀들이 물질하다 나와 쉬는 풍경을 촬영한 사진으로 1922년께로 추정된다. 멀리 산방산으로 보이는 오름이 있는 것을 보면 대정지역의 바닷가에서 찍은 것으로 판단된다. 김태호는 1920년 해녀 권익 보호를 위해 제주해녀조합을 설립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 해녀들이 물질하다 나와 쉬는 풍경을 촬영한 사진으로 1922년께로 추정된다. 멀리 산방산으로 보이는 오름이 있는 것을 보면 대정지역의 바닷가에서 찍은 것으로 판단된다. 김태호는 1920년 해녀 권익 보호를 위해 제주해녀조합을 설립했다. <출처 :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태안

김태안金泰安1909(융희3)~?. 제주 야체이카 항일활동. 본관 김해

김종영(金宗英)3남으로 한림리 -수풀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년단 활동을 뒤에서 지원했다.

제주도 야체이카가 포진하기 이전부터 한림리의 독서회는 이익우(李益雨)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이 독서회는 19323월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의 학교장 배척 항일운동으로 복역을 마쳐 귀향한 양두옥(梁斗玉) 6명에 대한 환영회를 개최하는 데 가장 활발했다

김태안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33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김태연金泰淵1909(융희3)~1990,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공산당 항일활동. 일본식 성명은 마루다(丸田가네야마(金山). 본관은 광산

한학자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의 장남으로 산북 삼도리 제주-성안에서 태어났다. 19275월 일본으로 건너가서 193010월 전협(全協) 화학노조에 가입했다

193112월에는 현호경(玄好景·성산), 노마(野間勘次郞일본인)의 권유로 일본공산당에 입당해 전협(全協)의 프락치로 활동하게 됐다.

오사카지구 동지구 문서 배포계 및 다니야마(谷山) 고무공장 분회원으로 활동 중 19336월 검거돼 동년 11월에 기소됐다. 19341112일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이 선고돼 옥고를 치렀다

김태윤金泰玧생몰년 미상. 검사. 변호사. 본관 경주

서귀포시 효돈동 -에서 태어나 서귀중학교를 거쳐 1957년 제주대학 법과 제1회로 졸업했다.

9회 사법고시에 합격해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로 재임했고 귀향해 제주에서 변호사업을 개업, 제주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제주시 조천읍 연북정 앞에 있는 김태호 기념비
제주시 조천읍 연북정 앞에 있는 김태호 기념비

김태호金泰鎬1880(고종17)~1942(일제강점기). 제주해녀어업조합 창립. 교육 사업가. 호 사전(舍田). 본관 김해.

조천리 조천포에서 태어났다. 1910(융희4) 나라를 잃게 되자 교육입국(敎育立國)을 주장해 조천리에 신명사숙을 개설, 이 지역에 개화 인사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기여했다.  이때 근친 김사호(金思鎬)가 교지를 희사하자 의숙 설립이 빨라졌다

이는 1919년에 이르러 조천공립보통학교의 개설 운동이 다른 지역보다 앞서 일어나게 된 원인이 됐다

192812월 조천리 이민은 김태호 및 김사호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는데 현재 조천초등학교 교정에 사전(舍田) 김태호 및 주사 김사호 창교(創校) 기념비라고 적혀 있다

그는 1920년 경상남도에 출가 중인 해녀의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제주해녀조합의 설립 발기인으로 활약했다. 이는 부산의 해조물(海藻物) 무역상들이 조선해조주식회사를 설립해 해녀의 생산물을 착취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 제주 해녀들이 경상남도 지역민과의 충돌이 빈번하니 이를 조정하기 위해 조합 설립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해녀조합 설립자인 김태호의 노력으로 조합원이 8000명에 이르고 1년에 4만 엔을 은행에서 기채해 조합원에게 대부하는 등 사업 장려에 힘을 쏟았다.

1923년 제주노동공제회 이사로 불우하고 빈곤한 계층에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조천면장으로, 1929년 조천교의 학무위원으로 지역 발전과 교육 후원에 앞장서는 등 언제나 주민 편에 서서 일을 처리해 주변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42년 그가 타계하자 동년 12월 조천리 이민들이 사전거사(舍田居士) 김공태호 기념비를 비석거리에 세워 그의 높은 뜻을 기렸다.

김태준金泰俊1912(일제강점기)~?. 경성지검 검사대리. 판사. 변호사. 서예가. 호는 요산(樂山). 본관 김해

정산(亭山) 김재병(金在柄)의 아들로 애월읍 납읍리 -오름에서 태어났다. 그 후 김재우(金在羽)에게 입양됐다

1931년 제주농업학교 제21회의 차석으로 졸업한 후 전남 광양군청 기수(技手)로 발령받았다. 해방 후에 사법요원 양성소에 입소, 마침 입소자 전원을 사법관 시보로 채용해 제주에서 합격한 5명 모두 시보(試補)로 임명됐다.

김태준과 김영길(金榮吉)은 제주지법에, 양을(梁乙), 김방순(金邦順), 이재만(李才萬) 등은 제주지검에 각각 보직을 받았다. 194881일 경성지검 검사대리로, 또 동 12월 판사로 임명돼 제주지법에 보직을 받았다.

전주지법 판사, 변호사, 제주도선거관리위원, 대한적십자사 제주지사 고문, 대한노인회 제주도지부장 등을 역임, 고향에 경로당이 건립하게 되자 부지 530평을 쾌척했다

주민들은 그를 기려 요산 김태준선생 송덕비를 세웠다. 제주시 삼도2무근-에서 병몰, 저서로는 수상집 낙수유실(落穗有實)’이 있다.

김태현이 경영했던 인수당 한약방.
김태현이 경영했던 인수당 한약방.
김태현

김태현金台現1880(고종17)~1945. 한약종상(漢藥種商). 호는 해봉(海峰). 본관 김해.

제주시 삼양1-에서 김세원(金世元)3남으로 태어나 지금의 이도1동 관덕로 길가에 있는 한약방 인수당(仁壽堂)을 창업했다

이 약방은 지금껏 3대째 이어오고 있는데 1911년 당시 서당(書堂)에서 글을 가르치던 그가 한약종상 면허(免許)를 취득했다. 한약방을 경영한지 1세기가 넘는 세월이다.

그동안 아들 김재홍(金在洪·1970년 사망)을 거쳐 지금은 손자 김한주(金漢柱)가 서울대학 약대를 졸업한 후 운영하고 있다

그의 한약에 관한 지식은 당시만 하더라도 따를 자가 없어 일본인들도 많이 이용하였는데 일본 순사(巡査)들도 그에게 약을 지으려면 무릎을 꿇고 앉아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나라 잃은 한을 조금이나마 풀었다고 전한다.

그는 한약방을 운영하면서도 1929년에 고향의 초등 개량서당인 기성의숙(期成義塾)이 설립되자 많은 관심과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1934년에는 숙장(塾長)을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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