탯줄을 아버지가 이로 끊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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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가른다'는 말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서 탯줄을 자른다는 말이다. 탯줄을 '삼줄'이라 하는 까닭도 이에서 말미암는다.

요즘 산부인과에서는 가위를 사용하지만 우리 조상은 대나무칼이나 수숫대 껍질 등을 썼다. 자손이 귀한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이로 삼을 가르기도 해다. 수명이 길어지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빙허각 이씨라는 여성이 저술한 '규합총서'라는 문헌에도 탯줄은 이로 끊고 묵은 솜에 풀솜을 입혀 보관한다고 했다.

다만, 여자아이가 태어날 때는 동생이 사내이기를 바라는 뜻에서 낫이나 식칼을 쓰기도 했다.

민간에서 이랬으니 왕실에서는 탯줄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대단했을까? 왕실 아이들의 탯줄은 태실(胎室)이라 해서 별도 보관장소를 만들었다.

이런 과정이 탄생이라면, 그 이전 임신에 대한 우리 민속신앙은 어떠했을까?
치성을 드리는 일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 아이를 갈망했다. 아이를 배기 위해 정월 초하루에는 달걀을 먹는가 하면, 경북지방에서는 남의 논에서 주운 벼 이삭 100개로 밥을 지어 먹기도 했다. 심지어 황소나 수퇘지 생식기를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삶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믿음도 있었다.

순산을 위해 순산이나 다산의 경험이 있거나 쌍둥이를 낳은 부인의 치마를 구해다가 입는가 하면, 이들을 불러와 임신부의 배를 문지르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태어나 일정 연령이 되면 성인식을 치르고 결혼도 한다. 성인으로 대접받는가 아닌가에 따라 품삯이 달랐으며 품앗이에서도 그 이전에는 반품이었다가 온품으로 승격된다. 나아가 마을 집회소인 사랑방에 출입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진다.

결혼을 요즘은 예외없이 '結婚'이라 쓰지만 이 '婚'자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록 저녁을 의미하는 '昏'(혼)이라는 글자와 혼용되는 현상이 많이 발견된다. 왜 그랬을까?
낮 12시 무렵인 오시(午時)는 태양이 꼭대기에 올라 있는 시점이라 하루 중에서도 양기가 가장 강한 때로 보았다. 그러니 밤 12시 무렵은 음기가 가장 드센 때가 된다. 하지만 결혼은 남녀간 결합이자 합궁(合宮)이므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기가 세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양과 음이 동시에 균형을 맞춘 시간은 오후 5-7시가 된다. 저녁 무렵인 것이며 이 때를 맞춰 신혼부부는 합궁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식들을 낳고 살다보면 마지막에는 죽음이 다가온다.

전통시대 가장 엄숙한 죽음은 역시 왕이 죽어 치르는 장례인 국장(國葬). 왕은 죽은 지 3일을 기다렸다가 시신을 관에 넣었다.

TV 사극에서 왕이 죽으면 환관이 궁궐 꼭대기에 올라가 흰 천을 펄럭이면서 울부짖는 장면을 더러 볼 수 있다.

전통시대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한다. 하지만 거의 유일한 예외가 있으니 죽고 난 직후 이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지붕에 올라가 흰 천을 펄럭이면서 북쪽을 향해 왕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북쪽은 죽음을 관장하는 곳이라, 그 북극과 죽음을 관장하는 신에게 죽은 혼을 돌려달라고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이를 초혼(招魂)이라 한다. 이런 제목을 단 김소월의 유명한 시도 있는데, 실은 이런 의식은 죽음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장면이다.

'죽음'을 전공하는 정종수(53)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이 관ㆍ혼ㆍ상ㆍ제의 네 가지 단계로 나누어 '사람의 한평생'(학고재 펴냄)을 훑은 민속학적 탐구물을 내놓았다.

정 과장은 "우리 어머니들은 아이를 갖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왜 아들이면 금줄에 고추를 달고 딸이면 솔가지를 달았는지, 아이의 이름은 어떻게 지었는지, 궁합은 왜 보았는지, 3년상의 의미는 무엇인지, 제사는 형제끼리 돌아가며 지내면 안 되는 것인지와 같은 것들에 대한 답변으로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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