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근대 건축의 선구자…민속자연사박물관 등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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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필원, 조천 만세운동 참여
 김한섭, 근현대 건축 발전 기여
 김한정, 8년간 신유의숙 교직
 김항유, 만세운동 주도·옥고
 김행옥, 교육·역사연구 매진
제주시 화북동 출신 건축가 김한섭이 설계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전경. 전남대학 의대 합동강의실, 광주교육대 등 광주지역 주요 건물들을 비롯해 제주교대도 그의 작품이다.
제주시 화북동 출신 건축가 김한섭이 설계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전경. 전남대학 의대 합동강의실, 광주교육대 등 광주지역 주요 건물들을 비롯해 제주교대도 그의 작품이다.

김필원金弼遠1900(광무4)~1950(분단시대).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 항일활동. 해방 후 건준 집행위원. 본관 김해. 전 명월만호 김항유(金恒裕)의 장남

산북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한학자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의 손자이며 독립운동가 김평원(金平遠), 김지원(金志遠)과는 모두 종형제 사이이다

1919321일 제1차 조천리 만세운동 시위를 주도했다. 이 항일 운동은 사립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유학한 김장환(金章煥)이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315일 귀향해 김시범(金時範), 김시은(金時殷) 등에게 서울 만세운동 소식을 알리면서 구체화됐다

김장환의 백부인 김시범을 주축으로 백응선, 박두규와 함께 미밋동산(味毛峙)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할 때 김필원도 참가했다. 그는 이 일로 체포돼 동년 4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공소하자 동 5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됐다.  해방 후 제주도 건준(建準) 집행위원이 됐다

1950년 정체불명인(不明人)에게 암살당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광복절에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한섭金漢涉1920(일제강점기)~1990. 건축가. 목포공업학교 교유. 전남대학교 교수. 호 천봉(天峰). 중앙대 건축미술과 전임교수로 퇴임. 본관 김해

제주시 화북동 벨도에서 태어났다

전남 송정(松汀)공업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滿洲國) 건축국에서 근무, 1939년 일본대학 부설 고공(高工) 건축과를 졸업하고 박길용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혀 1944년 목포공업학교 교유로 재임했다

해방 후 전남도청 영선계장으로 임명돼 전남건축문화협회를 창립하고 부회장에 취임, 전남 건축계의 선구적인 위치에서 일을 했다

1952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공학부 마츠이(松井) 연구실에서 연구생활 끝에 1955년 전남대학교 교수가 돼 조선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1957년 김한섭 건축설계사무소를 마련해 광주시 충장로 3가에 처음으로 콘크리트조() 5층 건물이 세워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1963년 건축연구소를 서울로 옮겨 홍익(弘益)대학교와 중앙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1976년 이후는 중앙대학교 건축미술과 전임교수로 정년퇴임했으며 서울에서 활동하는 한종언(韓鍾彦)을 비롯해 전남대의 임영배(林永培), 부척량(夫坧量)교수도 그의 문하생이다

광주의 주요 건물은 대부분 그의 작품이며 용아빌딩은 당시 대서특필 될 정도였다. 전남대학 의대 합동강의실, 광주교육대, 제주교육대,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등을 그가 설계했다. 호남 건축계에서 활동하는 문하생들은 거의 그의 영향을 받았다

제주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의해 고향으로 운구돼 안장됐다.

김한정金漢貞1896(고종33)~1946(미군정기). 독립운동가. 제주 혁우동맹의 항일활동 가담. 광복 후 건준 도지부 보안부장. 본관은 경주

김영춘(金榮春)의 아들로 산남 대정읍 가파도 겔파-에서 태어났다

1921년 김성숙(金成淑·가파도)이 설립한 가파도의 신유의숙(辛酉義塾)에서 8년간 교직 생활을 하면서 무산 소년소녀야학회를 개설, 배일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했다. 기미 3·1 운동 당시 학생 신분으로 가담했던 김성숙이 신유의숙의 숙장으로 있으면서 항일 인사 김한정, 송종현(宋鍾炫), 강문범(姜文範), 문달진(文達珍), 이병호(李丙浩), 장종식(張鍾植) 등을 초빙해 교육을 담당하게 했다.

또 가파청년회를 지도하면서 1925년 제주청년연합회의 집행위원이 됐다. 또 신인회(新人會)라는 급진적인 사상 단체를 조직, 이때 외종제 오대진(吳大進)과 함께 활동하면서 활달한성품과 적극성을 보였다.

그는 1927년에 조선공산당에 입당, 19309월 모슬포에서 예배당 설교 방해사건으로 일경에 구속됐다

항일인사 오대진, 이도일(李道一), 김한정, 이신호(李辛祜), 진해생(秦亥生), 이운방(李運芳), 이성윤 등 7명이 항시 교유했다. 이들은 대정 지방의 사회주의 운동가들로서 결국 이 일로 벌금형에 처해졌다

193114일 본도 사회주의 최고지도자 강창보(姜昌輔)가 석방되자, 제주 지역 항일운동은 활기를 되찾았다. 동년 음력 정월 초순 제주읍내 부태환의 방에서 강창보, 부태환, 김민화, 김한정, 김순종, 장종식 등이 모여 제주도 사회주의운동자간담회를 개최, 조선청년동맹·신간회를 해소하고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 조직에 착수했다

또 가파소년회를 지도하면서 이들에게 항일정신을 의식화하기 위해 동년 6월 제주도 소년운동지도자협의회를 개최했다.

1932112일 일어난 구좌면 해녀 항일투쟁으로 전도의 청년 항일운동가들이 이듬해 3월까지 검거될 때 그도 잡혀 신재홍 외 39명은 재판에 회부됐다

1933228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모두에게 중형이 내려졌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고 동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 제주도지부 보안부장(保安部長)으로 선임됐다. 좌우익의 갈등 속에 19451112일 밤 우익 청년단체 한라단으로부터 테러를 당했다.

그는 194610월 미 군정 당국에 의해서 지명수배돼 검거령이 내려지자 즉시 도피했다. 경남 삼천포 근처(일설에는 여수)에서 도항하던 중 선박 침몰사고로 사망했다

청년 동지들이 반장(返葬) 운구해 그가 활동하던 안덕면 대평(나드르)에서 면민장(面民葬)을 거행했다.

김항유金恒裕1874(고종11)~1908(융희2). 선비. 자 관녀(寬汝). 본관 김해.

조천읍 조천리 조천포에서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91(고종21) 제주목사 이규원(李奎遠)이 실시한 진사시(進士試)에 전군형(全君亨·상가더럭김우종(金佑鍾·조천김학현(金學鉉·제주-성안) 등과 함께 합격했다

김필원은 조선 3·1 만세운동에 가담, 이를 주도한 관계로 일제 당국으로부터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김행옥(金行玉):1916~2002. 교육자. 호 무애(無碍). 본관 나주

애월읍 납읍리(과납) 김계형(金桂瀅)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본의 명문 사학인 메이지(明治) 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해 제주 교육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애월중학교, 조천중학교,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제주농업고등학교(현 제주고) 교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제주농고 교장 재직 시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해 큰 화제가 됐다

당시 척박했던 제주 교육 발전의 초석을 다졌으며,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특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각별한 애정과 노력을 기울였다

제주사범대학 강단에 올라 후배 교육자 양성에도 일조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면려포장(현재의 근정포장) 등을 수상했다.

그는 제주 역사 연구에도 매진했다. 조선시대 제주역사의 주요 사료인 탐라지를 번역했으며, 탐라사료(耽羅史料), 납읍향토사지리, 김성조 건공장군 행장 등의 다양한 저술을 통해 1세대 향토사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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