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제주서 유년 시절…어머니의 풍금소리가 時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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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덕, 추자도 발전에 기여
김현복, 제주판관·감목관 제수
김현승, 독특한 시 세계 이뤄
김협, 노귤선생 덕망 칭송돼
김형배, 조천 만세항일 운동
제주-성안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시인 김현승은 어머니의 튕기는 풍금소리를 들으면서 시심을 부풀렸다. 사진은 광주지역에 세워진 김현승의 시비. 사진 아
래 오늘쪽은 영인본으로 발간된 김현승의 시집.

김현덕金炫德1919(일제강점기)~1987, 제주도의회 의원. 추자면의회 의장. 본관은 청주이며 추자면 신양리 -작지에서 김상래(金相來)의 외아들, 하추자도에서 수산업에 종사했다.

1952년 추자면의회 의원에 당선, 북제주군 교육위원으로 뽑혔다. 1956년 면의원에 재선되고 의장으로 뽑혀 추자도 발전과 면민을 위해 기여한 바가 컸다.

196012월 제3대 제주도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의회가 해산돼 정치활동이 중지됐다. 낙도인 하추자도에 별정 우체국을 마련하기 위해 부지를 내놓고 건물을 지어 196512월 사설 하추자우체국을 개설했다.

김현복金鉉復생몰년 미상, 제주판관. 감목관으로 제수, 1842(헌종8) 2, 김최선(金最善)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448월에 파직, 18411225일 통훈대부(通訓大夫) 제주판관 겸 제주진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감목관으로 제수되자 이듬해 120일 하직하고 동 219일 도임했다. 재임 중 184211월 이원조(李源祚)목사에 의해 우도와 가파도의 기경(起耕)허가가 내려지자 사람들이 입주하기 시작했다. 본래 우도는 말을 기르고 가파도는 흑우(黑牛)를 방목하고 있었다.

1834년에 영혜사(永惠祠) 동쪽 귤림서원 곁에 향현사(鄕賢祠)를 건립, 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의 봉향처로 삼았으며, 1849년에 이르러 영혜사에 봉향하던 명도암 김진용(金晉鎔)을 이 향현사로 옮겨 추향했다. 18423월 제주 삼읍의 원호는 1820호이고 인구는 76081명이다. 계묘(1843)년에 식년 문과 초시를 실시, 판관으로서 고관(考官)이 되어 184293일 설장(設場), 3일간에 걸쳐 시행했다.

김현승金顯承1913(일제강점기)~1975. 시인. 본관 김해. 호 다형(茶兄). 평양 출생, 기독교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 창국(昶國)과 어머니 양응도(梁應道)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목회지(牧會地)를 따라 제주시 제주-성안에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어머니의 손놀림에 튕기는 풍금소리를 들으며 시심(詩心)이 부풀었다.

7세 되던 해에 전라남도 광주로 이주하여 기독교 계통의 숭일학교(崇一學校)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 1936년 숭실(崇實)전문학교 문과 3년을 수료했다. 그 뒤 모교인 숭일학교 교사(1936), 조선대학교 교수(1951~1959), 숭전대학교수(1960~1975),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1970) 등을 역임했다.

문단활동은 숭실전문학교 재학 때 장시(長詩) ‘쓸쓸한 겨울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 양주동(梁柱東)의 추천으로 동아일보’(1934)에 게재되면서부터 시작된 이후 낭만적 장시 새벽은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1934)·‘새벽교실등을 계속 발표했다.

그 뒤 1953년부터 광주에서 계간지 신문학(新文學)’6호까지 간행했으며 이때의 시로 내가 나의 모국어로 시를 쓰면’(1952)이 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정신과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내용을 시로 형상화해 독특한 시 세계를 이루었다.

1시집 김현승시초(金顯承詩抄)’(1957)와 제2시집 옹호자(擁護者)의 노래’(1963)에 나타난 전반기의 시적 경향은 주로 자연에 대한 주관적 서정과 감각적 인상을 노래했으며 점차 사회정의에 대한 윤리적 관심과 도덕적 열정을 표현했다. 그가 추구하는 이미지들의 특징은 가을의 이미지로 많이 나타나는데 덧없이 사라지는 비본질적이고 지상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꽃잎·낙엽·재의 이미지와 본질적이며 천상적인 가치를 상징하는 뿌리·보석·열매의 단단한 물체의 이미지의 이원적 대립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표현한 시적 방법의 특징은 절제된 언어를 통하여 추상적 관념을 사물화하거나 구체적인 사물을 관념화하는 조소성(彫塑性)과 명장성(明澄性)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후기 시세계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제3시집 견고(堅固)한 고독’(1968)과 제4시집 절대(絶對) 고독’(1970)의 시세계는 신에 대한 회의와 인간적 고독을 시적 주제로서 줄기차게 추구함을 보여준다. 1974년에는 김현승전시집(金顯承全詩集)’을 펴냈고 유시집(遺詩集) ‘마지막 지상(地上)에서’(1977), 산문집 고독(孤獨)과 시()’가 간행됐다. 문학개설서로는 한국현대시해설’(1972)이 있다.

1955년 제1회 전라남도문화상을 받았고 1973년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다. 광주 무등산국립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가을의 기도//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가을에는/사랑하게 하소서/오직 한사람을 택하게 하소서/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가을에는/호올로 있게 하소서/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백합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학창시절 가을이 되면 한 구절씩 읊조렸을 만한 시구절이다.

김협金浹1829(순조29)~1894(고종31), 시인, 의약업(醫藥業) 종사자. 본관 김해, 자 성흡(性洽)이고 호 처음 우계(愚溪)라 하고 제주에 와서 노귤(老橘)이라 했다. 전라남도 나주에서 김계완(金啓完)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노귤은 8세에 대학을 읽고 9세 때에 부친상을 당했다. 칠서(七書) 외에 역사, 의약 등의 글을 널리 섭렵하지 않은 게 없었다. 후일 처자를 거느리고 소안도에서 침구술을 연구하면서 10수년 떠도는 나그네가 되었다. 1876년 겨울에 바다를 건너 제주로 들어와 처음 대정지방에 정착하더니 또 월산(月山)에 살다가 제주성 서쪽 신성동(新城洞)에 정착해 살았다.

귤나무가 집을 둘러싸고 마당에는 약초가 가득하여 흔히 사람들은 노귤선생 댁, 혹은 나주 김약국댁이라 불렀다. 그리고 간혹 생도들을 가르치면서 약을 팔고 침을 놓아 그 덕망과 은혜에 칭송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면서 일생동안 술회한 시가 모두 220()나 됐다.

친히 사귀었던 선비로는 소백(小柏) 안달삼(安達三), 영운(靈雲) 김홍두(金洪斗), 능봉(菱峰) 고성겸(高性謙)이 있었을 뿐이었다. 문하생인 묵농(墨農) 김종현(金鍾炫)은 노귤을 평하여 자기를 처신함에는 공손하고, 사람을 접하면서는 공경하며 가르치는데는 엄숙하고 대화는 따뜻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약국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분의 학문과 의술업의 재주와 그 깊이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189454일 타계하니 향년 66세였다. 영운 김홍두는 말하기를 노귤의 시는 도연명이나 유종원의 경지에 들어갔으며 제주에 들어온 후 더욱 다듬어졌다고 평했다. 그의 시는 노귤시

(老橘詩集)’으로 엮어져 편 끝에는 홍박사(洪博士) 종률(鍾律)이 행장을 쓰고 김진사 병윤(炳胤)이 전()을 쓰고 고지규高志奎가 발문을 썼다. 노귤의 묘갈문(墓碣文)1921년 진재(震齋) 이응호(李膺鎬)가 써서 오늘에 전한다. 노귤이 이승을 뜬지 106년만인 200012월에 노귤시집·화암시집이 번역돼 제주문화원에서 간행되어 그의 문학을 재조명 받게 됐다.

김형배金瀅培1901(광무5)~1944(일제강점기), 기미년 조천 만세운동의 항일 활동.

호적상에는 김영배(金瑩培)로 표기. 본관은 김해, 김희식(金熙植)의 아들로 산북 조천리 조천포’ ‘묵동(墨洞)’ 2607번지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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