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 감귤나무 7그루…제주 아픔 지켜본 산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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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도련과원과 제주감귤의 역사
고익보, 무과 급제 종2품 가선대부
변성우, 임금 임석한 과거시험 급제
양제하, 곡식 437석 내놔 주민 구제
도련과원
도련과원 감귤나무

이번 여정을 준비하던 질토래비는 도련마을에서 오래된 감귤나무들을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그런 마음을 담아 지방문화재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7그루의 감귤나무들이 있는 곳을 도련과원이라 명명했다. 이번 여정에서는 당유자, 병귤, 산귤, 진귤 4종류 7그루의 재래 귤나무가 잘 보존되고 있는 도련과원에서 제주감귤의 역사를 떠올려본다.

천연기념물 도련과원에서 도련선인들을 떠올리다.

재래귤 중에서 가장 큰 댕유지(당유자)는 식용, 약물, 제물 등의 다양한 용도로 쓰였기 때문에 보존이 잘 된 편이다. 벤즐이라 불리는 병귤은 관목으로 자라며 열매는 과실부가 돌출된 형이어서 다른 재래귤과 쉽게 구별된다. 산물이라 불리는 산귤은 가지가 촘촘하며 마디가 짧다. 진귤은 재래귤 중에서 향기와 맛이 으뜸이다. 과실의 껍질은 다소 거칠지만 신맛과 향기가 강하다.

최근에 이곳에 설치된 가의대부(2) 공조참판 탐라고공익보 생가 및 가묘(家廟)라는 표지석에 새긴 내용으로 보아, 이곳은 탐라고씨 매촌파의 파조인 고익보의 생가 터로 여겨진다. 이 터의 주인 고익보는 부친에 이어 같은 마을 출신인 변성우로부터 훈학을 받았다. 또한 구휼의인 양제하도 이 마을 태생이다. 이에 김찬흡 선생이 2016년 편찬한 제주인물대사전에서 이들에 대한 내용을 추려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회방노인(回榜老人) 고익보’. 도련들(도련의 옛명칭)에서 고처성의 아들로 태어난 고익보는, 1765년 이광빈 등 32명과 함께 무과에 급제, 1778년 명월진 만호에 부임, 이듬 해에 사직했다. 1825년 그의 나이 87세의 고령임에도 왕명에 의해 회방노인으로 상경하자, 순조 임금은 그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크게 칭찬해 종2품인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공조참판을 내림과 함께 말과 양식을 하사했다. 도련 출신이며 전적을 지낸 변성우의 문하에서 부친에 이어 글을 배운 고익보는, 18세에 향시에서 으뜸으로 합격했다. 부인 백씨가 183095세로 천수를 누려 돌아가신 다음 해에 그도 93세로 따라가니 군자해로(君子偕老)라 했다. 1908년 부해 안병택(부친은 안달삼)이 그의 비갈문을 지어 오늘에 전한다. (이곳에는) 오랜 세월 가묘를 지어 모셔 오다가 19484·3으로 불타 없어졌다.

오현단 증주벽립(曾朱壁立) 모사(模寫)한 변성우’. 호는 영헌이고 초명이 변성진인 변성우는 부친 변시중이 중면(제주시) 도련들 매촌에서 훈학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1763년 어사 이수봉이 내도하여 과거시험을 치를 때 그는 종형 변성운과 동향인 김형중과 함께 동방급제 했는데, 당시의 제목은 창창일점한라산(蒼蒼一點漢拏山)이다. 1765년 임금이 친히 임석한 자리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인 친림전시(親臨殿試)에서도 변성우·변성운·김형중 3인이 급제하자, 제주목사 윤시동이 참석한 가운데 마을(납읍)에서는 큰 잔치가 열리기도 했다. 외직으로 전라도 장성의 청암찰방, 전주의 삼례찰방 등을 역임했다. 조상 대대로 애월읍 납읍과 관련이 깊은 변성우는, 이후 매촌에 살았던 관계로 원주 변씨 매촌파의 파조가 됐다.

구휼의인 양제하’. 도련들에서 태어나 1876년 제주판관을 지낸 양제하는 1863년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장흥군의 벽사찰방과 장성군의 청암찰방, 부안군의 격포진 수군첨사, 경상도의 경주영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곡식 437섬을 내놓아 굶주리는 주민들을 구제한 일로 1879년 조정에서 포상을 받았다. 이는 제주목사 백낙연이 조정에 상신한데 따른 조치였다. 제주목사 백낙연은 1877년 가을부터 흉년으로 제주에서 기민이 늘어나자 곡식을 조정에 요청, 구휼하였다. 이해 가을에는 메뚜기떼들이 대단위로 제주 전역에 나타나 농사에 큰 피해를 입혔다.

도련과원 내 집터 추정
도련과원 내 집터 추정

도련과원에서 제주감귤의 역사문화를 떠올리다

탐라가 아니면 보기조차 어려운 것(제각탐라견상난 除却耽羅見尙難)/ 더구나 먼 바닷길로 어렵게 보내왔으니(원래하황수정간 遠來何況水程艱)/ 귀인의 집에서도 얻기 어려운 것(귀인문벌유희득 貴人門閥猶稀得)/.

고려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1241년 제주 부사였던 최자에게 감귤을 선물받고 지은 위의 한시는, 감귤의 맛과 향을 예찬한 시로 유명하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실릴 만큼 제주감귤은 사대부들에게는 인기있는 과일이었다. “1052(문종 5) 탐라국에서 해마다 바쳐오는 귤의 납부량을 100包子(포자:보자기)로 개정했다는 고려사에 있는 글이 귤과 관련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라 한다.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귤나무는, 수령이 380세로 애월읍 상가리에 있다. 이 귤나무는 13대째 물려내려온 상가리 진주 강씨 집안에서 자라고 있다. 나무이름은 산물낭 이라 부르는 진귤나무이다. 진귤은 향기와 맛이 독특하여 지방 특산물 중에서도 상품에 속하는 진상품이었다. 수령이 100년 이상의 재래종 귤나무는 제주에 185그루 정도 남아있다고 한다. 문헌에는 35종의 재래감귤이 제주에서 재배됐는데, 현재 12종이 남아 있다. 온주밀감 나무는 수령이 50년이면 뿌리가 썩는데 반해, 380년 된 진귤나무는 뿌리와 밑동이 여전히 튼튼하다. 진귤은 밀감보다 작지만 향이 진하며, 껍질은 조금 거칠다. 동의보감에 진피는 산물(진귤)의 껍질만을 말하며, 한방에서 감초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약재로 성질이 따뜻하며 맛은 쓰고 매우며 독이 없다고 적혀있다.

1526(중종 21) 이수동 목사는 임금께 진상할 귤을 마련하기 위해 별방, 수산, 서귀, 동해(중문 근방), 명월, 5개 방호소에 과원을 설치했다. 그 후 제주목에 22개소, 정의현에 7개소, 대정현에 6개소로 증설됐으며, 숙종 시에는 모두 42곳에 이르렀다. 제주읍성에는 동서남북중 5개 과원과 별과원 등 6과원이 있었으며, 귤과 유자가 익어갈 때 사방은 온통 금빛 세계를 이뤄, 이를 귤림추색이라 했다.

하지만 감귤은 제주사람에겐 고통나무였다. 귀한 진상품인 감귤을 재배하는 제주 선인들에 대한 관리들의 수탈이 심했기 때문이다. 어사 김상헌(金尙憲)남사록(南槎錄)’에는 해마다 7, 8월이면 목사는 촌가의 귤나무를 순시하며 낱낱이 장부에 적어두었다가, 감귤이 익을 때면 장부에 따라 납품할 양을 조사하고, 납품하지 못할 때는 벌을 주기 마련이었다. 이 때문에 민가에서는 재배를 하지 않으려고 나무를 잘라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풍이 불거나 병에 걸리면 달렸던 열매가 떨어질 수도 있는데, 낙과한 것마저 민가에 책임을 전가했던 것이다. 그래서 귤나무에 끓는 물을 부어 일부러 죽이기도 했다 한다. 감귤 진상 제도는 1894(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폐지됐다. 200세가 넘은 도련과원의 감귤나무들은 제주 선인들의 고통을 지켜본 산증인이자 역사적인 나무유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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