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 나무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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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여름 하늘에서 불잉걸을 쏟아붓는 건 아닌가. 7월 하순께 긴 장마가 걷히더니 기다렸다는 듯 여름이 활활 타오른다. 연일 폭염주의보가 발효 중이다. 사람이 발을 놓고 생명을 의탁하는 대지를 한순간에 불태우기라도 할 양 덥다. 스쳐 지나던 한 좨기 바람마저 스러지더니, 허공으로 비상하던 새의 날갯짓도 뚝 그쳤다. 더위에 사위 고자누룩한 한낮.

차창 밖이 8월의 햇살에 눈부셔 어지럼을 탄다. 이비인후과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 망설이다 불쑥 객기가 발동했다. 아무리 여름이 제철이라지만 이건 우심하지 않나. 일방적·공격적인 것에 뒤물러 설 일이 따로 있다. 이열치열, 더위에 맞서자고 뼈대를 세우니 근육이 의기투합해 꿈틀댄다

연동 입구에 이르자 버스에서 내렸다. ‘이제부터 도심 속 아파트까지 걷는 거다.’ 더위 속을 헤쳐 강행군할 것임을 자신에게 선언했다. 나이 들면서 소소한 운신에도 잔뜩 주의를 기울이며 몸의 지시를 곧이곧대로 섬겨 온다. 오늘 한 번쯤 내 요구에 부응할 거란 확고한 믿음이 있다. 외려 걸음에 탄력이 붙을지 모른다.

정오가 목전인데, 하늘과 땅 사이가 열기로 가득해 불한증막 같다. 엊그제부터 최고기온이 34도라더니 틀리기 일쑤던 일기예보도 적중이다. 10여 분 걸었을까. 땀이 줄줄 흐르며 눈 속에 들어 바닷물처럼 짠 눈물에 눈을 못 뜰 지경이다. 누가 보면 웬 서러운 일로 땡볕에 눈시울 붉히며 글썽이나 하겠다.

덥다. 거리를 점령해 내달리는 차량들이 공연히 약 오르게 덥다. 셔츠가 몸에 척 달라붙고 바지에도 땀이 배어 몸놀림이 몹시 거치적거려 언짢다. 눈앞에 거대한 구실잣밤나무 군락이 숲으로 길을 덮고 있다. 한걸음에 들어섰다. 나무들은 폭염으로 무장한 여름을 거부하고 있었다. 딴 세상이다. 아직 선선한 아침을 품은 채 쏟아지는 햇살을 촘촘히 걸러내고 있다. 서늘하다. 싸고돌다 온몸으로 번지는 청량감에 머릿속이 맑아 오더니 눈 번쩍 띈다.

가로수가 어깨 맞대 숲 터널로 더위를 밀어내니 별안간 도시가 생광하는 것 같다. 일상에 치여 고단한 사람들이 길 가다 땀 들이는 곳. 애초 도시를 계획할 때 예견했을까. 도시 디자인은 자연과의 조합이라야 울울창창하다는 걸. 도심 속에 쉬어 가는 휴식을 위한 이만한 공간 마련이 있고, 나무가 그늘을 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길가를 덮은 그늘이 내려앉는 폭발적인 햇볕만큼이나 넓고 깊고 짙다.

다시 걷는다. 숲 터널은 삽시에 사라졌고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가로수 길을 지나야 한다. 여름 볕에 왕성하게 생장하고 있는 나무들, 그러나 아직 성목이 아니라 그늘이 넉넉지 못하다. 길이 등성마루 오르막이다. 듬성듬성 작은 그늘에 들어서서 숨을 고른다.

그새 40, 그에 비할 깜냥이 아니지만 쇠락하는 늘그막, 딴엔 더위 속을 열사의 사막을 가로지르듯 걸었다. 길가 나무 그늘은 더위에 가팔라 숨 가쁜 내게 큰 위안이었다. 잠시 쉬며 나무들이 숲으로 나앉아 꿈꾸는 걸 보았다. 그 꿈을 기어이 이뤄내고 있었다. 펼쳐 보인 꿈의 실체가 있었다. 바로 그늘이었다. 뭇 생명을 이롭게 하는 것만큼 성스러운 것은 없다.

아파트에 도착하니 하루가 하오로 고비를 넘기고 있다. 객기를 부렸을지 모르나 해 볼 만했다. 엘리베이터를 향한 걸음이 운율을 탄다. 길가 나무 그늘이 따라 들어오는지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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