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청록(靑綠)의 계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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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읍내 초등학교가 별안간 새 옷을 갈아입고 있어 깜짝 놀랐다. 벽체를 몇 등분해 빨강·파랑·노랑 삼원색을 칠하고 바탕에도 새 색을 올렸다. 칙칙하던 학교가 새로 태어난 모습이다. 그냥 달라진 게 아닌, 재탄생이다. 빛깔의 묘용(妙用)이 효용 가치를 발휘했다는 느낌이 들면서, 색채의 해방과 창조에 혀를 찼다.

현대인들은 색상 표출에 자유분방하다. 파스텔 톤이나 흑백은 진부하다. 모호하고 단조 순일한 것에서 탈피해 다양한 색을 추구한다. 색에 관한 관념이나 기준 같은 경계의 억압을 파괴한 지 오래다. 다분히 공격적·도전적이다. 철철이 입는 현란한 여인들 의상에서, 그림에서, 도시 디자인에서 색상의 연출은 자유자재하다. 색상이 폭발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하지만 이 발랄한 색상들은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빛깔 무지갯빛에서 크게 나아가진 않았다. 무지갯빛은 수많은 색상들 속에서도 빛난다. 가지런한 질서 속에 색의 얼마나 아름다운 조합인가. 세상 어디에도 이만한 색채의 스펙트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시인은 우러러 영롱한 언어로 시를 내려받고, 화가는 강렬한 화의(畫意)를 품었다. 영적인 상상력이 모두 거기서 발원했지 않을까. 무지개가 하늘에 뜨는 한 곱디고운 빛을 잃거나 흩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무지개에 갇힌 색의 비밀과 만난다. 어깨 맞닿고 초록과 파랑이 빚어 놓은 청록색. 녹색과 청색이 아닌, 청록색에서 색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이건 하나의 발견이다. 무지개에서 초록과 파랑은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양극단의 빨강과 보라를 끌어당김으로써 태어난 청록색. 자신을 열어놓고 끌어안는 포용의 색깔이다. 그러니까 청과 녹의 중간색, 한여름 바다로 남실거리는 갈맷빛이다.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다. 그 사이에 있는 산과 들과 나무와 풀들이 다들 푸른색이다.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할 게 있다. 그냥 푸른 게 아닌, 녹색이라거나 청색이라 할 게 아닌, 그것은 청록색이라는 것.

눈 들어 여름 하늘 아래 미만해 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보라. 다들 청록을 두껍게 껴입고 여름의 왕성한 생장을 뿜어내고 있을지니. 그들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물을 길어 올려 나무의 목마름을 축인다. 뻗어 오르는 가지와 무성한 잎이 가을의 결실을 준비 중이다. 청록은 끝내 결과(結果)한다. R.M 릴케는 가을날에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고 노래했다.

색상은 평등하나 여름엔 다르다. 청록은 여름을 지배한다. 활활 불타는 한여름 태양의 열기를 가득 품어 생명을 보듬는 유일한 색, 청록이다.

일에 부대끼다 쉼이 절실할 때, 하루라도 도시를 떠나 하늘과 바다를 바라볼 일이다. 파란 하늘과 그에 더 파란 여름 바다가 만들어내는 푸름은 일상에 치여 고단한 우리에게 쉬고 가라는 청신호다. 푸름은 금세 흘러들어 눈에 생기가 돈다. 때론 몇 분쯤,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눈뿐 아니다. 꿈틀거리며 생동하는 몸의 율동을 느낄 것이다.

녹색과 청색보다 중간색으로 틀어 앉은 중도성, 둘의 융합과 혼효의 색 청록이 좋다. 소망 하나 품고 싶다. 사람 사는,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을 청록으로 어루만질 수는 없을까. 청록색을 품으면 코로나19도 비켜가리라. 이 청록의 계절에 사람들이 저 푸른 산처럼, 나무처럼 마냥 싱그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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