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그네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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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재 수필가

마당이 생겼다.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그네를 들여놓은 일이었다. 거실에서 나오면 바로 닿는 데크 위에 놓았다. 전에는 벤치에 앉아 주변을 관망하곤 했는데 그네가 오면서 부터는 벤치가 아닌 그네를 자주 찾게 되었다. 그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 맛은 짙고 향기는 더 그윽하다. 또한 세상도 벤치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보였다.

고정된 벤치는 나에게 고정된 시각만을 보여 주었지만 그네는 변하는 시각을 보여줬다. 그네에 앉아 앞으로 나아갔다 뒤로 물러 날 때 마다 눈비가 다가올 때도 있고 눈비가 나를 피해 갈 때도 있다.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고 풍경이 움직이게 해 주었다. 게다가 사계절의 모습도 다양한 이동시각으로 다가왔다.

봄은 신선한 모습이었다. 바늘 끝처럼 땅을 뚫고 나오는 잔디, 가는 가지에 움트는 수정 같은 단풍나무 새순, 짝을 찾아 노래하는 새들,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내 몸에서도 새순이 돋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울리는 듯하다.

조신한 소녀 같은 봄과는 달리 정열의 여름은 열정적인 젊은 여인으로 다가왔다. 가뭄에 내려주는 소나기는 메마른 대지의 구원투수였고, 장맛비는 마당의 나무들과, 풀잎사귀들과, 곤충들마저도 자라게 한다. 또한 태양은 지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에너지를 주고 활기를 주며 생명을 불어 넣어 준다. 여름도 태양을 먹고 자란다.

그렇게 뜨겁게 달아올랐던 정열도 잠시 여름이 서서히 기운을 잃어 가면 그네에도 사색에 잠기는 가을이 찾아온다. 풀벌레들의 떼창 소리가 귀를 열고 들어와 가슴에 꽂히고 소슬바람에 낙엽 떨어지는 소리만 들어도 까닭 없이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네에 앉으면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밤하늘의 별처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별이 스치듯 반짝이며 날아가는 비행기의 불빛이 저만치 멀어지면 그리움이 그에게 닿을까 가슴이 두근거렸고, 불빛이 가까워지면 그의 소식이 들릴까 마음을 열어 놓는다.

여름내 풀이 무성해서 보이지 않던 무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도 가을이 되면서 부터이다. 그네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언덕배기 저만치에 두어 평의 무덤이 눈에 들어온다. 자손이 끊겼는지 무성한 억새사이로 가는 띠만 처연하게 퇴색되었다. 골총(古塚)이 되어 가는 무덤을 보니 생성하고 소멸하는 모습이 이런가 싶다. 이게 어디 남의 일이기만 할까. 아무리 가을이 사색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래도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으로 다가왔다.

가을이 그리움의 계절이라면 겨울은 나를 돌아보는 특별한 계절이기도하다. 눈이 내리는 날은 마음에 낀 찌꺼기들도 흰 눈 속에 감추고 싶어진다. 또한 순백이라고 믿는 눈이 마냥 순백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신작로에 내린 눈처럼 흙탕물을 뒤집어쓰지 않은 고운 모습 그대로 간직되는 꿈을 소망해본다.

그네도 처음 우리 집에 올 때는 청년이었다. 몸통은 튼실했고 밧줄은 젊은이 근육처럼 팽팽했으며 이음매도 탄탄했다. 표면도 젊은 피부처럼 매끄러웠다. 그런 그네가 십여 년 세월을 견디기가 꽤나 버거웠나 보다. 표면에는 저승꽃이 피고 이음새는 헐거워져서 움직일 때마다 관절이 삐거덕 거린다. 그리고 힘줄마저 느슨해졌다.

나도 한창일 때는 탄력 있는 피부와 퇴행성 관절도 모르는 팔 다리를 가졌었다. 그리고 척추 뼈마디가 꼿꼿하게 중심 잡힌 당당한 청춘이었다. 보약이 필요치 않았고 병원 문턱도 높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 하고 의사 앞에만 서면 온갖 엄살을 떠는 아낙이 되었다. 오늘도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왔다. 조금씩 감지되는 이상 신호를 무시하고 주행했더니 그 후유증이 크다.

그네도 다르지 않다. 이곳저곳에서 기울어져가는 것을 보면서도 방심했다. 고쳐서 쓰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제는 데크에서 벗어나 구석진 곳으로 밀려나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동안 무료한 일상에서 나에게 각별한 즐거움과 변화의 시야를 보여주느라 일생을 바친 그네에게 방심한 죄가 늦은 후회로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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