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임금 붕어에 백성들 망곡한 곡반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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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길리·장정리 공동간이수도 조형미 일품…조상의 삶과 역사 보존 필요
4·3의 아픔 간직한 원동마을, 군인들이 주민 60여 명 학살 참상 벌어져
사시사철 솟아 오르는 유수암 용천수, 깨끗한 수질과 풍부한 수량 자랑
곡반제단.
곡반제단.

멍덕동산에는 망곡단(望哭壇) 또는 망배단(望拜壇)으로도 불리는 곡반제단이 있다.

곡반제단은 임금님이 돌아가시면 소길리와 장전리 등지의 유림들이 북쪽을 향해 곡소리를 내며 제사를 지냈던 현장이다. 이번 질토래비 여정에서는 지난해 향토유형유산 제25호로 지정된 곡반제단과 소길리와 장전리에 설치된 공공 간이수도 물통을 살펴보고, 유수암천이 흐르는 유수암리 일대를 돌아본다.

향토유형유산인 곡반제단(哭班祭壇)

곡반제단은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인근 마을의 백성들이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며 망곡햇던 자리로 알려진다. 제주도는 곡반제단 비를 지난해 6월 향토유형유산 제25호로 지정했다. 또한 이곳은 분묘 쓰는 일을 금하는 금장지(禁葬地)였다. 4·3 당시 축성기일을 넘기면서도 멍덕동산 밖으로 성곽을 쌓아 초소를 마련했다고 한다. 망곡제단은 제작연도와 제작동기에 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정도로 보존가치가 매우 높은 문화재로 여겨진다.

소길리 공공수도 물통.
소길리 공공수도 물통.

조형미가 일품인 소길리·장전리 공동 간이수도 물통

제주도는 1962년 간이공동급수시설 4개년 계획을 수립해 대대적인 수원개발사업을 전개했다. 소길리와 장전리의 공동 간이수도 물통도 이즈음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소길리 마을 세거리 중심지에 조성된 자그마한 공원에는, 수령이 300년이 넘어 보이는 팽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고, 팽나무 공원 아래에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도 손색이 없을 커다란 간이수도 물통이 자리 잡고 있다. 안내판이 없는 것이 옥에 티다. 갓의 차양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독특한 형태의 조형미가 일품이다.

비를 가릴 수 있도록 시설된 물통은, 당시 군인들이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해 만들었다고 전한다. 1961년 애월면 수산리에서는 제주도 최초의 지하수 관정 기념식이 있었다. 1964년의 가뭄은 50년 만에 당하는 천재(天災)였다. 중산간 마을에서는 물을 돈이나 곡식으로 사 먹었다. 1971년 가뭄 때는 중산간 마을에는 소방차, 군 트럭을 동원하고 섬에는 여객선, 도항선, 어선으로 물 수송에 나서기도 했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웃 마을 장전리에는 1960년대에 개설된 간이수도가 현재 2개가 남아 있는데, 인근 마을인 유수암리의 물을 끌어다 쓰기 위해 주민들이 부지를 매입하고 공사에도 참여하여 일군 것이다. 소길리 물통은 사유자에 있다. 두 마을에는 빼어난 조형미뿐만 아니라 네모형의 물탱크와 지붕까지 덮은 수도시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수도꼭지 밑에는 물팡이 둘러져 있어 수돗물을 받을 때 허벅을 이용했음을 짐작케 한다.

실용적이면서 간결해 세련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물통은 보존가치가 매우 높은 문화재로 여겨진다. 제주도의 마을마다 있었던 우물과 연자방아 등이 산업화를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다. 조상들의 삶의 역사가 파괴되지 않도록 남아있는 유물들을 아끼고 보존하는 자세가 더욱 필요한 요즈음이다.

원동마을 원지
원동마을 원지

소길리 원동마을의 아픔

소길리 마을 외곽에 위치한 원동마을은 제주의 역사문화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제주목과 대정현을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한 이곳에 194811월 제9연대 군인들이 60여 명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시신과 함께 마을을 불태웠다. 인적이 끊긴 마을 터엔 대나무와 팽나무가 숲을 이루며 지난날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었고, 지척에 있는 평화로에는 승용차들이 내달리고 있었다. 이후 보는 원동마을이 친근하면서도 더욱 애처롭다.

현재 마을 입구에는 이 마을 출신 재일동포가 세운 院址(원지)라는 표석이 서 있고, 하천 건너편에는 당시 주민들이 살았던 집터들이 대나무 숲에 가려져 있다. 다시 찾아간 그곳에서 다음의 내용을 담은 표지석을 만날 수 있었다.

원동(院洞)은 조선시대 제주목과 대정현을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길을 가던 나그네들이 쉬어가던 곳이었다. 4·3이 한창이던 19481113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 군인들은 인근 하가리와 상가리 주민들을 학살하고 새벽녘 원동으로 올라왔다. 군인들은 마을에 하루 종일 머무르면서 주민 40여 명과 길 가던 사람들을 포함해 60여 명을 학살했다. 군인들은 시신 위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기도 했다. 아이들과 노인들만이 학살의 와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원동은 주민이 살지 않는 폐동이 돼 버렸다. 1990년 가을, 이곳 원동마을 유족들은 옛마을 터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부모와 마을주민들을 위로하는 무혼굿을 벌였다.”

유사 이래 유수암천이 흐르는 유수암리

목장과 밀림 그리고 한라산 국립공원과 이웃하는 유수암리는, 본동인 유수암 마을과 거문데기 그리고 5·16 이후에 조성된 개척단지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을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시사철 솟아 흐르는 유수암천이라는 용천수가 있다. 1270년대 초 김통정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군이 식수로 이용한 바로 그 샘물이다. 풍부한 수량으로 인해 마을이 형성되고 물길을 따라 논밭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1987년 먹는 물과 빨래와 목욕을 하는 물로 나누고, 샘이 솟는 곳은 반달 모양의 거석으로 덮고, 2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연못을 만들어 오늘의 유수암 명소를 조성했다. 4·3 당시 마을이 소개되자 유수암천 흐름이 멈추고 식수통 바닥이 드러났다. 하지만 마을이 재건되어 사람들이 돌아오자 유수암천에서는 예전처럼 샘물이 솟아났다 한다.

1960년대 초반 소길리와 장전리에서 마을 공동수도를 설치할 때 유수암천 샘물을 이용했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다. 1970년대 이후 어승생 용수로 상수도가 일반화됨에 따라 유수암 샘물도 덜 찾게 됐다. 깨끗한 수질과 풍부한 수량으로 인해 설촌 이래 한번도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았다 한다.

유수암리는 한때 금덕리라 부르기도 했는데, 삼별초군을 물리친 원나라가 웃동네에 목자촌을 설립하여 금물덕이라 명명한 데서 비롯된다. 금물덕(今勿德)으로 표기하는 거문데기는 흑암(黑巖)을 일컫는데. 덕은 둔덕의 의미이며, 데기는 덕의 변음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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