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고 긴 목을 꼿꼿이 세운 무리…아부오름의 생채기인가
이곳 어딘가에서 마른 꽃으로 산화한 수많음 목숨들이여
떠나는 피뿌리꽃
아부오름을 떠올리면 피뿌리꽃이 따라온다. 화사한 꽃다발이 단아한 빛깔로 합창하던 시선, 분위기를 압도한다. 귀한 족속처럼 오름 위를 도배할 듯 수놓던 꽃자리다. 어여쁨이 화가 된 듯, 쉬이 꼬리 잘린 퇴장이 아직도 아이러니다.
붉고 긴 목을 꼿꼿이 세운 무리, 그 곁을 지나려면 발부리조차 조심스럽다. 잔뜩 긴장한 새빨간 목을 곧추세우다 긴 목조차 더 길어졌는지 모른다. 세간의 집중된 시선이 꽤나 부담스럽던지 수많은 전략회의도 갖고, 똘똘 뭉쳐 눈빛 더욱 부라리고 한 목소리로 위기 모면하려 궐기대회마저 가졌을 테다.
뿌리가 꽃의 모가지보다 더 붉디붉다고 했던가, 제 운명을 예견이라도 했을까. 이름조차 뼈아픈 피뿌리꽃의 크고 작은 수난사, 이미 오래전 송당리 아부오름의 조바심 속 시절이다.
영산회상 세 번째 곡 ‘세령산’과, 서편제의 ‘소릿길’을 현희순님의 반주에 전병규님의 소금 연주로 감상한다. 지난날 아부오름의 아픔을 위무하듯 살포시 젖어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 ‘파란 마음 하얀 마음’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성악가 윤경희님이다. 어떤 아픔도 어루만질 듯 합창으로 동심을 이끈다.
“나만큼 나를 만지지 못하는 것도 없어서/ 한쪽 어깨가 무너지고 나면 다른 한쪽은….” 김효선 시인의 ‘굼부리*의 날들’ 전문을 김정희와 시놀이(이정아, 이혜정, 장순자)의 릴레이 낭송이다.
마른꽃들이 지나갔다
절망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올 때
송당리 아부오름으로 차를 몬다 거기,
나만큼 너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
두 개의 심장이 척척한 공기에 둘러싸여
삼나무 아래를 지나는 꿈을 꾼다
잎으로만 살던 시절을 내려놓고
다시 네 생일이라고 잔뜩 미역을 불리고
수위를 넘긴 바다가 창문을 엿볼 때
젊어서 뼈를 묻은 억새들
가시를 기다리다 지쳐 오름이 되었겠지만
나만큼 나를 만지지 못하는 것도 없어서
한쪽 어깨가 무너지고 나면 다른 한쪽은
자꾸 나무가 자라는 기시감
영원히 나를 껴안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마른 꽃들이 흔들렸다 신발 뒤축으로
*굼부리: 화산 분화구를 뜻하는 제주방언
-김효선, ‘굼부리*의 날들’ 전문
이곳 어딘가에서 마른 꽃으로 산화한 수많은 목숨들이다. 부디 눈으로나 담고 가도 될 일을, 야생 잔디가 있는 곳에서나 겨우 산다는 것도 모른 채…. 한때의 피뿌리꽃의 뒷배경이다. 그들의 절규를 보듬진 못 할망정 어찌 지우개로 지워낸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일까. 지천이던 붉은 목 위로 부라린 눈빛 사격에도 아랑곳 않던, 가시 돋친 손길에 저들은 얼마나 떨어야했을까. 빼앗긴 목숨, 그 빈자리로 합장한다. 불협화음처럼 기억하고 있을 아부오름이다.
사회-정민자
사진-허영숙
영상-김성수
음향-최현철
그림-유창훈
시낭송-김정희와 시놀이
음악-전병규, 현희순, 윤경희, 서란영
글-고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