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기울어지는 국세 바로잡고 외세 침략 대항세력 키워
(149) 기울어지는 국세 바로잡고 외세 침략 대항세력 키워
  • 제주일보
  • 승인 20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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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조천 만세 항일운동 주도
김희은, 한학자·정의향교 직원
김희정, 한문서당 훈학 항일운동
김희주, 한말의 문신·제주군수
김희취, 삼별초 무장·탐라 항전
1892년(고종29) 김희정(金羲正)을 비롯한 제주의 선비들이 귤림서원 자리에 5개의 조두석(俎豆石)을 세워 오현을 모시는 제단으로 삼았다.
1892년(고종29) 김희정(金羲正)을 비롯한 제주의 선비들이 귤림서원 자리에 5개의 조두석(俎豆石)을 세워 오현을 모시는 제단으로 삼았다.

김희수金熙洙1899(광무3)~1985, 기미년 조천 만세 운동의 항일활동. 후일 김희명(金熙明)으로 개명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본관 김해, 김문국(金汶國)의 아들로 산북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1919321일 일어난 제1차 항일 만세 운동을 주도, 군중 500여 명이 조천 마을 주요 도로를 따라 시위행진을 하고 제주 성안으로 향하던 중 조천 경찰관주재소 간타(神田) 순사부장과 순사 2, 보조 순사 2명이 시위대를 제지하려 했다.

그는 426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동년 529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기각, 결국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천수를 누리고 1985123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弘恩洞) 28-362 번지에서 사망하였다.

김희은金熙殷1865(고종2)~1949(미군정기), 한학자. 정의향교 직원(直員). 자는 경지(敬之), 호는 우석(友石). 본관은 경주이며 남원읍 태흥리 -에서 김경흡(金暻洽)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석은 한말로부터 일제전기에 걸쳐 산남 정의군 일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었다. 그의 글을 모은 우석문집이 있다. 19079월 조정에서는 김희은을 양상용(梁翔龍), 강희룡(姜熙龍), 고희면(高熙冕)과 함께 각 구역 지방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하였다.

19098월에는 정의향교 직원으로 김희은을, 제주향교 직원으로 김상수(金庠洙·하귀), 또 대정향교 직원으로 김봉두(金奉斗·화순)를 임명, 이때의 향교의 직원이란 유림의 수반이다. 우석은 구한말 정의군의 참사를 역임했다.

타고날 때부터 총명하고 나이가 들수록 도골선풍(道骨仙風)이 있어 함부로 성내지 않으면서 엄격해 보이고, 사납지 않으면서 위엄을 보여 후학들이 잘 따랐다.

해은문집(海隱文集).
해은문집(海隱文集).

김희정金羲正1844(헌종10)~1916(일제강점기), 한학자, 숭인전(崇仁殿) 참봉(參奉), 한문서당의 훈학에 따른 항일운동. 한말로부터 일제 강점기의 한학자. 자 우경(佑卿), 호 해은(海隱) 혹은 포규(蒲葵) 불렀다. 본관 김해, 조천리 조천포에서 김성휴(金性休)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5(철종6) 매계(梅溪) 이한진(李漢震)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857년 조천리 윤규관에게 1860년 승보시를 알려졌다.

1864(고종1) 과거공부를 위해 상경 전 제주목사 목인배를 뵙고 그의 아들 목유석(睦裕錫)에게 배웠다. 1874년 면암(勉菴) 최익현을 제주-성안유배소에서 뵙고 성리학에 대한 강론을 들었다. 매계와 면암의 애국 사상과 외세 배격론에 영향을 받아 지사적인 훈학자라고 일컬어졌다.

1875년 문과 초시에 합격, 1879년 복시에 1891년 식년 회시와 증광 회시(會試)7회 응시했으나 모두 불합격, 1881년 상경 길에 노사(蘆沙) 기정진의 궤연(几筵)에 곡했다.

1882(고종19) ‘동문-삼천서당에서 역언(易言)’을 가르치며 이 해에 노봉흥학비를 세울 것을 청했다. 이 비는 현재 오현단에 있다.

따라서 당시의 서당 교육은 기울어져 가는 국세를 바로잡고 외세의 침략에 대항 할 수 있는 저항 세력을 양산해 내고 있었다.

민족 지사들이 펼친 서당의 독립운동 사상은 주체적인 민족 교육의 맹아이며, 한민족을 노예화하려고 한 일 제의 식민화 교육에 대한 투철한 항거였다.

이러한 저항의 예를 조천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또한 그런 민족 지사의 예를 김희정과 그의 후예들에서 찾을 수 있다.

1895년 한라정상에 올라 한라산기를 남겼다. 1902(광무6) 가을 면암이 현재의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 정산(定山) 장구(藏龜)동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했으나 뵙지 못했다. 1908년 충남 면암 고택에 가서 그의 궤연에 곡했다. 국권상실을 한탄하며 생을 마쳤다.

조천에 은거하며 평생 훈학에 종사하였는데 도내 원근에서 찾아와 배운 문하생이 많았다.

신미훼철(辛未毁撤) 이후 오현에 대한 제사를 지낼 곳이 없어지자 그의 발의로 오현단에 석실서원(石室書院)을 개설하고 사림의 자문을 받아 제단을 만들어 1년에 한 번 분향 천신(薦新)하도록 하였다.

김희정은 왕명에 따라 18918월부터 9월에 걸쳐 제주도와 남해안 일대의 왜구침입상황을 일행으로 참여하여 일기형식으로 도해록(蹈海錄)을 남겼으며 발문은 최익현이 썼다.

면암과 교분을 가진 것은 1873(고종10) 면암은 위리안치형을 받고 제주에 오자 제주유생들은 교류를 청했지만 독서를 이유로 번번히 거절했다.

김희정과 교유하면서 제주 유생들과 교분을 가졌다. 김희정은 면암과 종유하면서 척사론에 더욱 몰두하고 그의 제자들에게 그 영향을 주었다.

문학과 덕행으로 알려져 당시 애국 사상으로 매계(梅溪) 이한진(李漢震), 도학(道學)으로는 소백(小栢) 안달삼(安達三), 시학(詩學)으로는 해은(海隱)을 본도의 제일인자로 꼽았다.

한시 시집으로 김우경시(金佑卿詩)가 전해지고 있다. 해은의 손자 김지원(金志遠)은 현대시를 처음으로 개척한 시인이며 문학과 항일 운동에 관여한 후손들이 꽤 배출되었다.

김희주金熙冑1854(철종5)~1937(일제강점기), 한말의 무신. 제주군수(정의군, 대정군을 제외한 관할 구역) 및 정의군수. 본관 김해, 만호 김계병(金啓柄)의 아들로 조천리 묵동(墨洞)에서 출생하고 자 장여(長汝), 호 남파(南坡)이다.

1879(고종16)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1888년에 사헌부 감찰, 1890년에 강원도 평창군수를 역임하였다.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편됨에 따라 1897(광무1) 8월에 관찰사 제도를 고쳐 복군(復郡)되어 동년 12, 유긍환(兪兢煥)의 후임 제주군수 겸 관찰부 참서관으로 도임하였다.

1901(광무 5) 1월 김재용(金在鏞)의 후임으로 정의군수에 전임되었다. 제주군수 재임 중인 1898년에 찰미헌(察眉軒) 즉 이아동헌(二衙東軒)을 중수, 현재의 제주대학교 창업보육센터 자리가 그 터전이다.

김희취金希就생몰년 미상, 고려 원종 때의 무신. 제주 삼별초의 무장.

1271(원종12) 삼별초(三別抄)가 진도에서 패배하자 김통정과 함께 탐라에 옮겨 항전, 이듬해 4월 원나라의 유문(諭文)을 가지고 탐라로 가던 합문부사(閤門副使) 금훈(琴熏)이 보마도(甫麻島)에 표류하자 오인봉(吳仁鳳전우(田祐) 등과 함께 배 4척을 이끌고 가서 금훈의 배와 유문을 빼앗고 사람들을 모두 체포한 뒤 김통정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금훈 등을 추자도에 가두고 지키다가 김통정의 회보를 받고 낡은 배 한 척에 늙은 수수(水手) 1명을 붙여 금훈 혼자만을 초유문자를 주어 돌려보내고 모두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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