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에서 꽃피운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유배지에서 꽃피운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 제주일보
  • 승인 20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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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암 남쪽 고지대 절동산 무환자나무와 팽라무 군락
조정철과 홍윤애의 순애보가 깃든 묘역 유수암리에…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의녀 홍윤애 묘.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의녀 홍윤애 묘.

한라산과 더불어 유수암천을 보호하듯 둘러쌓고 있는 남쪽 고지대가 절동산이다. 삼별초군이 항파두리성에 웅거할 때 절동산 아래 맑은 샘을 발견한 고승이, 언덕 아래 암자를 지어 태암감당이라 이름하여 불사(佛事)를 시작한 것이, 유수암의 설촌으로 이어졌다.

무환자나무 및 팽나무 군락지.
무환자나무 및 팽나무 군락지.

무환자나무 및 팽나무 군락지 절동산(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

절은 이후 태산사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이형상 목사에 의해 훼철되었다 한다. 이를 증명하듯 절동산으로 오르는 108계단 아래에는 한자로 태산사라 쓰인 마모된 비석도 자리 잡고 있으며, 또한 고색창연한 숲이 절동산을 감싸고 있다. 숲에는 오래전 심어진 무환자나무와 팽나무들이 이곳의 연륜을 말하려는 듯 서 있다. 제주도기념물로 지정된 무환자나무는 높이가 12미터, 둘레가 2미터에 달하는 거목이다. 이 나무는 원나무의 종손으로, 둘레가 3미터가 넘는 나무에서 새로 싹이 나와 자란 후손목이다. 이 나무를 심으면 집안에 환자가 생기지 않거나, 자식에게 화를 미치지 않는다(無患子)고 하여 무환자나무라고 불리며, ‘도육낭또는 데육낭이라고도 부른다. 무환자나무 열매껍질을 예전에는 비누 대신 사용하였고, 사찰에서는 열매를 염주 만드는 데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절동산에는 수령이 300~500년 된 팽나무 9그루가 들어차 있는데, 가장 큰 나무는 높이가 16미터, 둘레가 6미터에 이른다. 절동산 인근에서는 도자기와 기와 조각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108계단을 오르면 넓은 잔디구장을 만나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한라영봉과 제주바다는 또 다른 매력 덩어리이다.

조정철과 홍윤애의 순애보가 깃든 묘역

전원주택과 별장들이 도처에 들어서고 있는 유수암리에는 우리의 발길을 이끄는 또 하나의 명소가 있다. 해마다 제주여성문화제가 열리는 현장인 홍윤애의 무덤이 바로 그곳이다. 평화로 근처 건승원(제주양씨 宗廟)으로 난 유수암리의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좌청룡우백호 지형과 배산임수가 좋아 보이는 곳에 묻힌 홍랑의 무덤을 만났다.

옥 같던 그대 모습 묻힌 지 몇 해이던가 (예옥매향엄기년瘞玉埋香奄幾年)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다 호소할 수 있길(수장이원소창천誰將爾怨訴蒼天)

머나먼 황천길 누굴 의지해 돌아갔던가 (황천로수귀하뢰黃泉路邃歸何賴)

젊어 나눈 피줄 간직하고 죽어 인연은 이어졌네(벽혈장심사역연碧血藏深死亦緣)

천고에 남을 그대 이름 아름다운 향기 높아(천고방명형장렬千古芳名蘅莊烈)

한 집안 두 자매 모두 절개 높고 (일문고절제형현一門高節弟兄賢)

두 송이 꽃에 보탤 내 글이 모자라니 (오두쌍궐금난작烏頭雙闕今難作)

무덤에 푸르른 풀만이 말갈기처럼 무성하니(청초응생마렵전靑草應生馬鬣前)

1777(정조 원년) 내가 죄를 입어 탐라에 안치되어 있을 때 홍랑이 나의 적소에 출입하였다. 정조 5(1781) 사건을 꾸미면서 나를 죽이려는 미끼로 삼으려 하자 홍의녀는 나를 살리는 길은 오직 자신의 죽음뿐이라고 결심, 혈육이 낭자하도록 형장을 받았으나 끝까지 불복하다 자결하니 그 날이 윤515일이었다. 그 후 31년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성은을 입어 방어사가 되어 내려와 이곳에 무덤을 마련하고 한 편의 시로써 그녀의 한을 달래노라.(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 조정철 쓰다.)

위의 글은 조정철이 제주 유배 시, 사랑한 여인인 홍윤애에게 바치는 조시(弔詩)이자 조문(弔文)이다. 제주에서 27년의 유배생활을 한 조정철은, 1811년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홍의녀와 그의 언니 무덤을 찾아 향을 피우고 술을 권하며 위의 시를 지어 그녀들을 위로하고 있는 이곳은, 유배문학의 꽃이라 여겨지는 현장이다. 이 묘비는 시비로는 우리나라 유일의 금석문이라 전해진다.

홍윤애 묘 안내석.
홍윤애 묘 안내석.

홍의녀로 알려진 홍윤애는 조선 영·정조 시 제주목에 살았던 여인으로 홍랑으로도 불린다. 조정철(1751-1831)1777년 정조시해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되어 적적하게 지내던 중 적소에서 시중을 들던 20살 홍윤애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1781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김시구는 집안 대대로 정적이었던 노론의 조정철을 죽이려 증거 찾기에 혈안이었다. 그러던 중 딸을 낳은 지 100일도 안 된 홍윤애의 자백을 받으려 모진 고문을 가했다. 사랑하는 낭군의 목숨은 자신의 죽음에 있다고 여긴 홍윤애는 형틀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연인의 생명을 지키려 목숨 바친 홍윤애의 순애보가 더욱 가슴을 친다. 이 또한 하늘의 뜻이던가. 조정철은 유배된 지 29년 만에 사면 복권되어, 1811년 제주목사로 자청하여 부임하였으니.

홍윤애의 묘는 처음에는 제주시 서사라 옛 교육감관사 건너 주변(표지석 있음)에 있었다. 1930년대 제주농업학교가 오현단에서 그 자리로 옮겨감에 따라 홍윤애의 묘는 지금의 자리인 유수암리 산 39번지로 이장되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전하는 조정철의 묘는 충주시 인근에 있으며, 조씨문종회에서는 최근에 홍윤애를 족보에도 등재하고 정식 부인으로 맞는 의식도 치렀다. 여성문화제 및 뮤지컬의 주인공으로도 다시 태어나고 있는 홍윤애의 순애보가 깃든 현장에서 옛사랑의 추억 하나 떠올림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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