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4·3의 탄혼…억울하고 슬픈 세월 새기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 피눈물에 맨발로 도망치듯
때 늦은 안부를 묻다
아부오름의 북동측이다. 피뿌리꽃들 다 떠난 자리로 갑옷 두르고 가시 세운 소나무가 빼곡하다. 오래 머물길 바라는 것은 흔적도 없이 쉬 사라지고 말까. 지난 날 피뿌리꽃들이 간신히 목숨 끌고 가던 터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 피눈물에 맨발로 도망치듯, 순한 눈 부라렸을 테다.
소나무들이 키재기 한다. 걸림이 없던 탁 트인 조망권도 가려놓고, 바람길조차 없다. 숱한 상처 녹아든 자리로 기웃거리지 않으면 바깥도 볼 수 없다. 굼부리 안의 선명하리만치 단아한 여백 또한 온데간데없다.
“한 발의 탄환으로 한 발의 그리움으로/ 신갈나무 원목에 나도 총을 겨눠본다”
총부리 겨눈 무수한 눈길을 의식하던 피뿌리꽃들, 자꾸만 어른거린다.
오승철 시인의 ‘송당 쇠똥구리’를 김정희와 시놀이(이정아, 이혜정, 장순자)의 릴레이 낭송이다.
잠시 세상의 밥 안 먹겠단 뜻일 테다
용눈이 오름자락 엎어놓은 막사발같이
산 번지 난장 벌이듯
월동하는 저 무덤들
봄이면 부화하리 겨울잠 깬 쇠똥구리
나는 봤다 바윗돌로 봉해버린 어느 동굴을
무수한 4·3의 탄흔
그 세월을 나는 봤다
한 발의 탄환으로 한 발의 그리움으로
신갈나무 원목에 나도 총을 겨눠본다
숭숭숭 벌집을 낸다
버섯종균 쏘아댄다
아, 섬과 섬 사이 저 오름과 오름 사이
대명천지 이 봄날 누가 나를 격발하라
삘기꽃 낭자한 터에
소리라도 굴리고 싶다
-오승철, 송당쇠똥구리 2 전문
그 많던 꽃들이 떠나던 시기의 예민한 언저리다. 그들에게도 가시가 있었다면 쉽사리 목숨까진 빼앗기진 않았을 테다. 정신까지 혼미하게 했던 게다. 억지웃음 말고 표정관리라도 했다면 달라지진 않았을까. 맑디맑은 본성을 승화시키지 못한 그리움을 삭힌다.
작년 몽골 여행 중에 피뿌리꽃밭 사진을 보내준 언니가 문득 떠오른다. 아직도 그곳은 자연에서 쉬이 만나는데, 눈에 담아도 될 것을 누가 다 쓸어가 버렸을까. 흔적조차 없어진 곳, 동시대를 함께 누릴 법한 데 말이다.
팬플루트 연주로 서란영의 ‘대니보이’와 ‘에버그린’이 어딘가로 남아있을 아픔을 위무하듯 결 곱게 어루만진다.
코로나19로 예정되었던 마불림난장 취소의 아쉬움을 김정희와 시놀이의 ‘마불림’ 즉석퍼포먼스다. 주차장 지킴이 큰 나무를 배경삼아 낭송시를 조합시켜 난장 끝 무렵에 짧게 부려놓는다.
난장공연 후 아부오름으로 향한다. 굼부리 안팎 나무들이 한창 몸피를 불린다.
피뿌리꽃 다 떠난 빈자리는 오래도록 휑했었지. 어느 누구도 그들의 절규를 귀담지 않았다. 주변을 맴돌았을 한숨소리도 주우며, 빼앗긴 여정의 때늦은 안부를 묻는다.
※다음 바람난장은 9월 5일 ‘구엄리 돌염전 앞 생이동산’에서 오전 10시에 진행됩니다.
사회-정민자
사진-허영숙
영상-김성수
음향-최현철
그림-유창훈
시낭송-김정희와 시놀이
음악-전병규, 현희순, 윤경희, 서란영
글-고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