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회 이끌며 구국운동 펼치다 대종교 창시
유신회 이끌며 구국운동 펼치다 대종교 창시
  • 김문기 기자
  • 승인 2020.09.0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철

▲나카이-모노싱:1882~?, 일본의 식물학자.
‘나카이-모노싱’中井猛之進은 이학박사理學博士. 일본 기후시<岐阜市>에서 태어나 야마구치<山口>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였다. 1908년 모교 동대의 조수로 발령받아 1927년 교수로 승진된 후 40여 년 간 재임하였다. 식물분류학의 권위자로서 1914년 ‘제주도 식물조사서’를 발표하였다.
초기 한국 식물 조사에 공헌한 학자는 일본인 우치야마-도미지로<內山富次郞>, 시로-가즈마<城數馬>, 우에키-히데미키<植木秀幹>, 모리-다메쇼<森爲三>, 이시도야-츠도무<石戶谷 勉> 등과 프랑스 사람으로 타케(Emile· Joseph·Taquet)와 포우리(Urbain Jian Faurie)가 있으며 한국인으로서는 정태현鄭台鉉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나카이<中井>박사와 타케신부神父가 제주의 식물 연구에 가장 큰 공헌을 남겼다.
제주도 식물에 대한 연구의 시초는 1905년에 당시 학생이었던 일본인 이치가와-상기<市川三喜>가 채집한 60여 종의 식물을 나카이-모오노싱과 다케다-히사요시<武田久吉> 등 두 사람에게 감정을 의뢰한 데서부터 비롯한다.
나카이<中井>는 1913년 내도하여 약 1개 월 여에 걸쳐 제주도의 식물을 조사하여 산남 서홍리의 성당에 주재한 프랑스 신부 타케가 채집한 식물표본을 감정하고 나서 1914년 ‘제주도 및 완도莞島 식물조사보고서’를 내기도 하였다.
1918년 미국의 하바드Hardard대학의 수림학자 윌슨(Wilson, E. D.)이 그와 함께 내도하여 채집하였다. 그 당시 채집한 구상나무를 1920년 신종으로 발표하였다.


▲나득황羅得璜:생몰년 미상, 고려 문신. 제주부사濟州副使 겸 제주방어사.
본관은 나주, 삼한공신 대광大匡 총례聰禮의 9대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유裕의 아버지이다. 최이崔怡가 선지사용별감宣旨使用別監으로 삼아 지방에 파견하였는데 이때 주구誅求가 심하여 백성이 괴롭게 여겼다. 그 뒤 최항崔沆에게 아첨하여 장흥부사가 되었다가 전라안찰사가 되었다.
1260년(원종1) 정월에 장물죄로 파면당한 송소宋佋를 대신하여 제주부사가 되었는데 현지에 이르자 사람들이 “제주는 옛적에는 작은 도적을 겪었는데 지금은 큰 도적을 만났다”고 하였다. 그 다음 달 경자에 제주부사·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로서 제주방어사를 겸하였는데 이는 제주가 바다 가운데 큰 진鎭으로 송상宋商과 왜倭의 내왕이 잦아지므로 유사시에 대비하여 취해진 것이다. 1263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으며 관직이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나억령羅億齡:생몰년 미상, 정의현감.
세병정洗兵亭을 창건, 1738년(영조14) 10월 김정봉金廷鳳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40년 5월에 떠났다. 정의향교의 명륜당과 재실齋室을 건립, 또 현청縣廳 일관헌日觀軒 서남쪽에 호장戶長의 거처로 현사縣司를 창건하고 남성 밖에 세병정洗兵亭을 창건하였다. 1739년 2월 8일 제주에 표도한 청인 157명이 경상도 우수영右水營(통영)의 병선 2척으로 수로를 따라 돌아가도록 했다.


▲나철羅喆:1863(철종14)~1916(일제강점기), 문신, 승문원 권지부정자, 대종교大倧敎의 창시자, 일명 나인영羅寅永, 한말의 지사, 대종교大倧敎 초대 교주. 독립운동가. 제주에 온 유배인.
유배인 김윤식金允植을 수행하여 5년 동안 제주에 거주하였다. 처음 이름은 두영斗永인데 인영寅永으로 개명, 자는 문경文卿이며 호는 경전經田, 혹은 홍암弘巖이다. 본관은 나주이며 전라남도 보성에서 나용집羅龍集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1년(고종28)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승문원 권지부정자副正字를 역임하였다. 1897년(광무1) 외무대신 김윤식이 제주로 종신 유배되자 같은 해 12월 23일 마포를 출발, 배편으로 1898년 1월 6일 제주에 도착하였다. 이때 김윤식을 사사하던 나철과 종 기동만이 따라와 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동년 3월 방성칠房星七이 민란을 일으키자 김윤식을 모시고 성산읍 시흥으로 피난하였다. 1899년 김윤식의 도움으로 미국행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1년 5월 진도를 거쳐 고향으로 들어가 돌아가신 선고에게 사죄하고 7월경 제주로 다시 들어오려 했으나 이재수李在守의 민란으로 유배인들이 모두 전남 타도로 옮겨지면서 중단되었다.
제주에서의 행적은 확실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대종교 창업에 따른 구상을 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런 도움을 김윤식에게 얻으려 했던 것 같다. 김윤식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그는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호남 출신의 지사들을 모아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구국 운동을 펼쳤다.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 운동을 계속하였으나 소득없이 귀국하였다.  이후 서울 재동에서 ‘단군 대황조 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 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라고 불리는 날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오대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入道를 구분하여 서기 전 2333년에 124년을 가산하여 ‘천신 강세 기원降世紀元’라 하고 단군교의 원년으로 발표하였고 1910년 8월에는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나팔기羅八紀:1623(인조1)~1676(숙종2), 무신. 제주판관. 사헌부 감찰, 본관은 나주, 자는 숙지, 호는 월암月岩.
지금의 김제시 신풍동 안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문무가 출중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651년(효종 2)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고 사헌부 감찰을 거쳐 남포현감을 지내다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관직을 그만두었다. 그 뒤 회천군수로, 이듬해 곡산군수, 이어 제주판관이 되었다.
전하기를 효종孝宗이 팔도에서 8명의 장사를 뽑을 때 마침 그도 뽑혀 용맹을 시험했는데 8장사 중 으뜸이어서 “보국순절輔國殉節의 중양지재重陽之材”라고 하였다. 묘소는 김제시 신원동 갈촌 마을 서쪽 산에 있으며 김제군 백산면 학산서원鶴山書院에 모시어 춘추 2회에 걸쳐 향사하고 있다.
1662년(현종3) 8월, 이만지李萬枝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665년 6월에 떠났다. 당시의 제주목사는 이익한李翊漢과 이중신李重信이며 판관으로 재임 중인 1765년(영조41) 봄부터 제주에서 고구마(일명:감저)가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실은 동래부東萊府 교리들은 조엄趙儼의 지시대로 묘포를 만들고 묘가 자란 후 다시 본포에 이식하여 가을에 약간의 감저를 수확하여 제1차 취종에 성공, 그 종저種藷 일부를 제주에 보내니 전파된 것이다.


▲남구명南九明:1661(현종2)~1719(숙종45), 문신. 제주판관.
자는 기서箕瑞이고 호는 우암寓菴, 본관은 영양, 종사랑 남상주南尙周의 아들이다. 168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93년(숙종19) 문과 식년시에서 병과로 급제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인 경상도 영해寧海로 내려가 10여 년간 은거하다가, 형 노명老明의 권으로 전적을 지냈다.
1712년(숙종38) 10월, 신선완申善浣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여 1715년 5월에 떠났다. 남구명은 본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순천에서 10여 년 은둔생활을 하더니 친형 남노명南老明의 강력한 권고로 제주판관에 착임, 청백리로 이름난 그는 제주에서 망아지 한 마리를 사서 길렀는데 그의 부하에게 주고 임기를 마쳐 순천으로 돌아갔다.
그 후 순천부사로 기용되자 제주판관 당시의 부하가 병든 망아지를 잘 길러 다시 가져왔다. 남구명은 옛날의 부하에게 여비를 주고 또 잘 대접하여 그 말을 돌려보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강창룡 2020-09-10 15:30:40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영조 41년(1765) 8월 13일 병진.

… 上略 … 今番濟牧尹蓍東去時 使之往復於萊伯得之矣 聞李泰遠之言 考之本草有之 而曰 南人多壽者 以此云云矣 上曰 東南郊好田地 皆芹畓 可惜矣 鳳漢曰 豈特芹乎 苽與眞瓜之屬甚多 而此亦生理 亦奈何 而最可惜者 南中好田 都是南草田矣 可悶矣 今甘藷若如胡瓢之賤 則足可救荒矣 上曰 誰得來乎 鳳漢曰 頃年通信使得來 而曺愼 受去取種而不成 姜必履至誠求得 至於隣邑 亦令持去云矣 醫官持入湯劑 命礈曰 甘藷在於本草云 考來 進湯劑 上曰 弘陵參奉李之陽 待監役窠 懸註調用事 分付. … 後略 ….

강창룡 2020-09-10 15:30:01
2. 나팔기(羅八紀):1623(인조1)~1676(숙종2),

‘판관으로 재임 중인 1765년(영조41) 봄부터 제주에서 고구마(일명:감저)가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실은 동래부(東萊府) 교리들은 조엄(趙儼)의 지시대로 묘포를 만들고 묘가 자란 후 다시 본포에 이식하여 가을에 약간의 감저를 수확하여 제1차 취종에 성공, 그 종저(種藷) 일부를 제주에 보내니 전파된 것이다’라는 내용은 100년 후에 생긴 일이며 이와 관련된 분은 윤시동(尹蓍東) 제주목사입니다, 이는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강창룡 2020-09-10 15:28:40
1. 나억령(羅億齡):생몰년 미상, 정의현감.

세병정(洗兵亭)을 창건, 1738년(영조14) 10월 김정봉(金廷鳳)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40년 5월에 떠났다. 정의향교의 명륜당과 재실(齋室)을 건립, 또 현청(縣廳) 일관헌(日觀軒) 서남쪽에 호장(戶長)의 거처로 현사(縣司)를 창건하고 남성 밖에 세병정(洗兵亭)을 창건하였다.

※ 이 당시에 현청(縣廳)은 일관헌(日觀軒)이 아니라 근민헌(近民軒)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조 41년(1765)애 편찬한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정의현(旌義縣)-관우(館宇)」에 정의현(旌義縣)의 관청(官廳) 이름과 위치에서 관우(舘宇)로서 아(衙)는 근민헌(近民軒)이며 동헌(東軒)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