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년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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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철 사회부장

제주도는 감귤과 함께 겨울채소(월동채소)의 주산지다.

제주산 겨울채소의 전국 점유율은 당근 81%, 양배추 40.1%, 무 33%에 이른다. 이외에 빨간무(비트)와 브로콜리, 풋마늘, 잎쪽파, 콜라비 등 품종도 다양해 과거에 ‘효자 작물’로 농민들의 지갑을 두둑이 채워줬다.

겨울채소는 7~8월, 늦어도 9월 중순까지 파종을 한다. 이후에 파종을 하면 서리에 싹이 얼어서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태풍이 강타해 새싹을 쓸어버리거나 침수 피해가 빈번이 일어난다.

8월 말부터 연달아 3개의 태풍이 농경지를 할퀴고 가면서 농민들의 한숨이 커지고 있다.

제8호 태풍 ‘바비’와 제9호 태풍 ‘마이삭’이 뿌린 물폭탄으로 농경지 1500㏊가 침수됐다. 제10호 태풍 ‘하이선’의 내습에 따른 추가 피해신고를 감안하면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8월 말에 파종을 끝내는 당근은 재파종이 어려워 많은 농가들이 월동무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월동무 과잉 생산에 따른 가격 폭락이 우려돼 제주특별자치도는 휴경보상금 카드를 꺼내 들었다.

겨울채소에 드리운 먹구름은 수입 개방과 소비 부진도 더해진다. 월동무는 깍두기와 치킨용 무, 단무지로 소비가 국한됐고, 당근과 양배추, 빨간무는 생채로 먹거나 샐러드 외에 특별한 요리법이나 국민들이 선호하는 가공식품은 나오지 않았다.

가뭄과 태풍, 폭설을 이겨내 수확한 겨울채소 앞에서 농민들은 풍년가를 부르지 못한다. 가격 폭락에 속이 타들어간다. 자식처럼 키운 겨울채소를 트랙터로 갈아엎는 심정은 참담하기만 하다.

더구나 제주 농민들은 농산물 가격의 30% 안팎을 물류비로 부담한다. 도내 농산물의 연간 생산량은 149만t으로 이 중 88만t(59%)은 다른 지역에 공급한다. 해상운송비로 연간 738억원이 소요돼 제주산 농산물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서울 가락도매시장에 출하해 제 값을 받지 못해도 물류비는 고스란히 농민들이 내야 한다.

피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은 대가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물류비만 내면서 빚더미에 앉게 됐다.

지난해 제주 농가의 평균 부채는 7512만8000원으로 2010년 4053만9000원 대비 85.3%나 늘었다. 농가 부채는 2014년부터 6년 연속 전국 1위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겨울 밥상의 푸른 채소를 공급했던 제주산 겨울채소는 수입 개방에 따른 과잉 생산, 태풍 등 이상기후로 인한 생산의 불안정, 과중한 물류비 부담, 소비 부진 등 악재가 겹쳤다. 제주농업은 한국농업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축소판이 됐다.

하지만 양배추에 들어있는 폴리페놀 성분은 위암의 원인인 헬리코박터균을 억제하는 효능이 있다. 위장약 시장을 선도하는 ‘겔××’는 양배추에서 유래한 성분이 들어있다. 겨울무는 인삼보다 좋다는 말이 있다.

“겨울에 무, 여름에 생강을 먹으면 의사를 볼 필요가 없다”는 속담이 있다. 채소는 자연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다. 위염을 억제하고, 혈압과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며, 발암물질로 부터 우리 몸을 보호해 준다.

이런 귀한 채소를 매년 갈아엎고 있다. 요리연구가 백종원은 강원도에서 폐품인 ‘못난이 감자’가 버려지는 것이 안타까워 방송에서 구매와 소비를 호소했다. 못난이 감자 30t은 바로 팔렸다. 소비 부진→가격 폭락→산지 폐기가 되풀이되는 겨울채소의 문제를 농정당국은 앉아서 바라볼 게 아니다.

감자깡, 양파깡, 고구마깡은 있지만 당근깡, 마늘깡은 없다. 국민들이 왜 제주산 겨울채소를 찾지 않는지부터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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