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재심청구 심문, 100살 할머니 망부가에 법정 '눈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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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에 옷 가져다 준 후 72년간 모지 못해"...재판부, 당시 불법 재판.감금.고문 등 사실 확인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지난 6월 행불인 수형자 재심청구소송 첫 심리가 열리기 전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제주4.3희생자유족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는 지난 6월 행불인 수형자 재심청구소송 첫 심리가 열리기 전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제주경찰서에 끌려간 남편이 너무 춥다기에 옷을 가져다 준 이후로 72년 동안 보지 못했습니다. 시신이라도 찾아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싶습니다.”

1920년생으로 올해 100세인 현경아 할머니는 1948년 4·3당시 행방불명된 남편 오형률씨(당시 28세) 대신 3남매를 키우며 억척스레 살아왔던 사연을 말하자, 법정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부장판사 장찬수)는 14일 국방경비법 위반(간첩죄·적에 대한 구원통신역락죄) 혐의로 옥살이 중 행방불명된 수형인 10명에 대한 재심 청구사건의 심문(審問)을 실시했다.

앞서 4·3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회장 김광우)는 지난 2월 행방불명 수형인 339명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향후 경인(서대문·마포·인천형무소), 호남(광주·목포·전주형무소) 등 수감된 형무소와 사건별로 20여 차례 심문을 실시한다.

이날 심문에서는 군·경 토벌대에 의해 가족이 강제연행 된 장면을 목격한 여부와 고문·취조를 한 당한 것을 들은 사실이 쟁점이 됐다. 이는 1948~1949년 군사재판 당시 많은 양민들이 내란죄 또는 이적죄로 수형생활을 했지만 기소장과 공판조서, 판결문 등 재판기록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모두 행방불명 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불법 체포·감금·고문 등 적법한 재판이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한 입증(진술)을 요청했다.

이에 김을생씨(86)는 “아버지(김경행씨)가 끌려간 후 어머니까지 경찰서에 불려가 전기고문을 받은 후 고문 후유증으로 젖이 안 나왔다. 3살 난 남동생에게 젖조차 물리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14살에 영평동에 살던 김씨는 당시 국방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아버지를 포함해 젊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고 증언했다. 토벌대는 김씨의 가족들에게 총구를 들이댔다가 “(빨갱이) 피가 옷에 튀면 더러운데 그냥 가자”라는 말이 나오자, 목숨을 부지했다.

고(故) 이기하씨(당시 25세) 동생 이상하씨(85)는 “중문에서 농사일을 하던 형님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조부모와 부모, 형제, 조카까지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8명 모두 총살당했다. 저는 죽은 척 엎드려 있어서 살아남게 됐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씨는 “산에 갔던 형님은 1949년 자수를 해서 내려왔는데 사형을 당해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고 울먹였다.

김필문 전 4·3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장은 “농사만 지으면서 낫 놓고 ㄱ자도 모르던 아버지가 15년 형을 마치면 집으로 보내줘야 하는데 죽은 날조차 몰라 생일날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며 “뼈 한줌도 찾지 못한 행방불명 수형인 유족을 위해 재심을 개시해 달라”고 호소했다.

재판부는 재심 청구인(유족)들의 진술과 수형인명부 등을 검토해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한다.

법원이 재심을 받아들이면 72년 전 전국 각지 형무소로 끌려간 후 행방불명된 이들에 대해 당시 체포·감금의 적법성과 재판의 정당성 여부를 판단하는 정식 재판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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