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당시 경찰이 좌익 혐의로 양민 학살 후 수장" 언급
"6.25 당시 경찰이 좌익 혐의로 양민 학살 후 수장" 언급
  • 김문기 기자
  • 승인 2020.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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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남상휘

남궁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
남도영, 말 문화 연구 개척자
남만리, 대정군수 4년여 재임
남산수, 남파선서 서양인 붙잡아
남치근, 제주목사로 왜구 척결
남도영 저 '제주도 목장사'
남도영 저 '제주도 목장사'

▲남궁찬南宮璨:생몰년 미상, 문신. 홍문관 교리, 제주목사. 본관은 함열, 자는 여헌汝獻, 호는 창랑滄浪.

1477년(성종8)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1489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다. 같은 해 사관으로 있을 때 왕명을 어긴 죄로 추국推鞠되고, 1495년(연산군1) 사간원 헌납를 역임하면서 1497년 문신정시에 1등을 차지하였다. 이듬해 홍문관부응교가 되었으며, 1499년 의정부사인·지제교 겸 승문원교감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이듬해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1500년(연산군6) 11월, 민휘閔暉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503년 7월에 떠났다. 함께 재임했던 제주판관은 김어적金魚適과 박종정朴從貞이다. 남궁찬 목사는 1504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외방에 나갔으나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다.

1517년(중종12) 12월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남궁찬은 당하관인데 당상관으로 승진시켜 보내었다고 하였다. 목사로 부임한 연도가 일치하지 않으니 이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남도영南都泳:1922(일제강점기)~2013, 학자, 부총장, 한국 ‘말 문화 연구’의 개척자, 전 동국대 부총장.

동국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0~1987년까지 동국대학 국사교육과 교수 역임, 서울시사편찬위 고문과 한국 마문화회馬文化會 회장을 지냈다. 1960년대부터 한국마정사 연구에 뛰어들어 2006년 ‘마문화연구총서’ 10권을 발간했다. 자주 제주를 드나들며 마정연구에 혼신을 다했다.

▲남만리南萬里:생몰년 미상, 대한제국의 군인 및 관리. 대정군수.

경기도 평택군수, 1894년 경상도 안의安義현감을 역임, 義政碑가 세워졌다.

1895년 거창부사居昌府使로 2년 재임하였다. 1902년(광무6) 7월 27일 전임 대정군수 홍우원洪祐元과 김일현金一鉉이 제주에 부임하지 않자 도임하여 4년 4개월간 재임하고 1907년 9월 경기도 평택군수로 떠났다.

대정군수로 재임 중의 치적은 1903년 10월 관보에 보면 ‘큰 지혜와 부지런함에 백성들이 모두 칭송하고 청렴하여 아전과 백성이 잘 따랐다’고 평했다. 그는 평택군수로 제수되어 떠났으며 본도에 있을 때에 ‘선생록’을 찬술하여 제주 역대 목민관의 내력을 밝혔다.

1906년(광무 10) 군수 남만리가 대정군 행정청인 윤경당潤經堂을 절애당節愛堂이라 편액하고, 대정 객사 동쪽에 있는 군기고에 소장된 무기·화약 등이 전부 소각되었다. 이는 일본군 육군부위陸軍副尉 평도반차平島半次가 칙명을 띠고 내도하여 지시한 것인데 을사조약으로 이 나라가 일본의 보호국이 된 때문이다.

남만리는 ‘탐라지’를 편저, 이 책은 일제에 의해 약탈, 일본 동경대東京大에 소장되었는데 1989년 제주대학에서 영인본影印本으로 500부를 발간하여 널리 보급되었다. 그의 이름을 새긴 마애명이 방선문訪仙門 바위에 현재 남아 있다.

방선문에 있는 남만리의 마애명.
방선문에 있는 남만리의 마애명.

▲남산수南山壽:생몰년 미상, 대정현감.

본관은 의령이며 전남 장흥군에서 남자용南自容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1년(선조14) 9월, 원응두元應斗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582년(선조15) 8월 부친상을 만나자 떠났다.

1582년 가을 대정현 차귀포遮歸浦(현 고산)에서 파선되어 타고 있던 서양인을 붙잡았는데 파선된 선박에는 중국 복건福建 사람 진원경陳元敬과 동양인 황생가黃生哥와 서양인 마리이馬里伊 등이 있었다.

일행은 모두 서울로 압송되어 진하사進賀使 정탁鄭琢 편에 명나라로 돌려보내었으니, 이는 기록상으로 처음 우리나라에 나타난 서양인의 표류라고 할 수 있다.

▲남상휘南相徽:1925(일제강점기)~?. 재미 교포, 해군 준장, 해군 제주경비부사령관 및 계엄민사부장.

1948년 제주 4·3 사건 당시 해안경비대(해군 전신) 목포기지 제3함정대 사령관으로서 제주 해안 봉쇄작전을 담당, 이는 북조선과 소련으로부터 무기 공급의 차단과 한라산 소위 인민유격대와의 연락을 봉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1949년 5월 10일 해군 제3특무정대特務艇隊가 제주도 반도叛徒 소탕작전에 출동, 해군중령 남상휘 사령관이 공을 세우고 목포항으로 돌아갔다.

그 후 해군 포항경비부사령관으로 있었으며 6·25 전쟁이 발발, 1951년 1월부터 약 1년간에 걸쳐 해군 제주경비사령관 겸 계엄 민사부장으로 발령되어 제주에 주둔한 바 있다. 1951년 1·4후퇴로 계엄령이 선포되어 계엄민사부장은 도지사와 경찰국장을 지휘함은 물론 행정청과 업무조정 및 지원을 맡고 있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남南 준장은 뉴욕에 거주하면서 범汎태평양전략연구소 소장所長 및 한반도통일기원탑 건립위원회 상임고문을 맡았다.

2000년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경찰이 1950년 7월 경주·포항·영덕 일원에서 주민 약 2백 명을 좌익활동 혐의로 검거, 소총으로 사살한 뒤 시신들을 해군에 인계해 함정에 싣고 바닷가에 수장水葬하였다.”고 말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처형 명령은 군의 경우 국방부, 경찰의 경우는 내무부 최고위층으로부터 전언電言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남치근南致勤:?~1570(선조3), 무신. 제주목사. 동지중추부사.

본관은 의령, 자는 근지勤之, 증조부는 지智, 아버지는 증병조판서 구俅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이서장李恕長의 딸이다. 또 엄용공嚴用恭의 문인이다. 1528년(중종23) 식년 무과에 장원, 명종 초기에 함경도병마절도사·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552년(명종7) 왜구가 제주를 노략질할 때 제주목사 김충렬金忠烈을 대신하여 목사가 되어 이들을 무찔렀다.

1555년 왜구가 60여척의 배로 대거 침입하여 장흥·영암 등 여러 성을 함락시키는 을묘왜변을 일으키자 전라도좌방어사로 이준경李浚慶과 함께 남평에서 대파하고, 또 녹도鹿島로 쳐들어오는 왜구를 소탕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영부營府를 다시 세우고 성을 보수하는 등 방어대책에 만전을 기하자, 이듬해 다시 침입해온 왜구를 격멸할 수 있었다. 1558년 왜구가 다시 침공해 온다는 풍문이 있어 전라도순변사가 되어 해변 방위를 순열巡閱하는 데 만전을 기하였다.

1560년 한성부판윤으로 승진한 뒤 경기·황해·평안 삼도토포사三道討捕使가 되었고, 1562년 황해도 재령의 해서海西에서 난을 일으킨 임꺽정을 잡아 효수하였다. 뛰어난 무력에 지략과 충용이 있어, 여러 싸움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시호는 무양武襄이다. 1552년 6월, 목사 김충렬의 후임으로 제주에 도임하고 1555년 2월에 동지중추부사로 제수되어 떠나니 세인이 명환名宦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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