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 이름이…
정류장 이름이…
  • 제주일보
  • 승인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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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여생 수필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바람을 피해 손을 ‘호호’ 불던 정류장 풍경은 추억 속 이야기로만 남아 있다. 이제는 버스 정보시스템에서 노선 번호만 입력하면 운행 시간과 현재 위치를 바로바로 제공 받을 수 있다. 편리한 세상이다. 모바일 앱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나가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 버스 정보시스템을 자주 이용하고 있다. 가끔 짐이 있을 때가 아니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버스 마니아이다.

버스를 이용하면 운전할 때의 긴장감이 없어 편안하다. 느긋한 마음으로 차창 밖의 계절을 읽기도 하고 사색의 시간도 갖는다. 가끔은 지친 몸을 쉬어가기도 한다. 이런저런 매력이 있어 버스 정보시스템 모바일 앱을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떡하니 내세웠는지도 모르겠다.

버스를 이용할 때 자동 음성 안내방송이 이제는 친근하게 다가온다. 정류장마다 이번 정류장과 다음 정류장을 음성으로 알려주고, 버스 안에서 이동할 때와 승하차 시 안전사고에 대한 주의도 빼놓지 않는다. 몇 달 전부터는 코로나19로 인해 버스 승차 시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됐다는 방송 안내가 하나 더 늘었다.

대부분의 버스 정류장은 마을 길목에 있다. 그런 이유로 정류장 이름은 거의 다 마을 이름들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나만의 시간을 가질 때도 정류장마다 이름을 안내해 주니 현재 위치를 알 수 있어 좋다. 간혹 오래전부터 불려오던 지명을 붙이기도 하는데, 그 지역을 지날 때면 지루하지 않은 재미가 있다. 지역 고유의 이름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하기 때문이다.

‘금산목’에 오면 산에서 금덩어리가 내 앞으로 굴러올 것 같고, ‘영등물’에 오면 영등할망이 제주 바다에 해산물 씨앗을 뿌리고 있을 것만 같다. ‘진드르’를 지날 때면 시원하게 트인 도로가 드넓게 펼쳐진 초록 들판이 연상되며 마음이 확 트이기도 한다. 그도 그렇듯이 진드르는 ‘긴 들판’이라는 옛 고유의 이름이란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때 함덕에 ‘911 의원’이라는 동네 의원이 있었다. 칡넝쿨처럼 얽힌 기억이지만, 아직도 정류장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걸 보면 내 기억이 분명하다.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시설인데 버스 정류장 이름은 아직 남아 있어 혼돈을 주고 있다. 버스 이용객 중 급하게 병원 진료가 필요할 때, 누군가는 이곳에 하차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삼양 검문소’는 또 어떠한가. 예전 불시검문으로 신분증 확인하던 기억에 정류장 안내방송을 하면 눈 감은 편안한 자세도 고쳐 앉아야 할 것 같고, 신분증도 잘 있는지 괜스레 확인해야 할 것만 같다. 검문소 폐쇄된 지도 꽤 되었는데 정류장 이름은 여전하여 버스 이용객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삼양 검문소 있던 자리에도, 911 의원이 있던 자리에도 오래전부터 불려오던 고유의 지역 이름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옛 지명을 찾아 마을의 정서와 현실에 맞게 정류장 이름으로 고쳐 놓는다면, 버스를 이용하는 내내 훈훈한 마음이 되지 않을까, 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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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효 2020-09-18 08:32:07
여생을 아름답게 보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