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제주여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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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훈,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논설위원

우리 할머니 성은 제주 고(高), 이름은 애절(愛節)이시다. 애국충절(愛國忠節)의 줄임말로 할머니 아버님께서 지으신 이름이다. 내 진외조부(陳外祖父)님은 생전 보천교(普天敎) 활동을 하셨고 1918년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에도 솔선하셨던 유학자셨다. 대한 독립을 바라는 충성스러운 절개를 담아 무남독녀 외동딸 이름을 그렇게 지으셨던 게 아닌가 짐작만 한다.

할머닌 무남독녀셨다. 지금 같으면 당연한 법적 권리를 누리셨겠지만 예전엔 출가외인이라, 정서적 기여뿐 친정 대소사에 아무 권한이 없었다. 할머닌 무남독녀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라 상속분이 전혀 없었다. 그걸 양자가 대신했다. 큰 고모는 생전 외손(外孫)의 설움을 자주 말씀하셨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조미료와 탄산음료에 길들어진 내 입맛엔 할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이 별로였다. 특히 쉰다리가 싫었다. 쉰다리를 오래 발효시키면 식초가 된다. 할아버진 자리물회에쉰다리 식초와 제피를 넣어 드셨다. 흐린 좁쌀 한줌과 보리쌀을 ‘낭불’로 끓여 만든 죽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대부분 음식들이 싱겁거나 슴슴했다. 아내는 그게 웰빙음식이고 로컬푸드라 한다. 하지만 마당에 모깃불 피워놓고 밤참으로 먹었던 감자와 옥수수는 지금도 그립다.

30여 년 전 어느 날 이른 아침 안거리에 살던 큰아버지가 “밭에 가게 마씸”하며 밖거리 할머니 방문을 열어보니, 할머닌 누워 주무시던 채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한다. 할머닌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조 밭 ‘검질’ 메고 솎음질하러 다녀오셨다. “산이나 바당, 어디 간들 이녁이 열심만 하면 먹을 거사 어시 크냐, 오몽 해질 때까지 간세 말앙 열심해야 먹엉 산다.” 할머니가 자주 하신 말씀이다.

경제사를 보면 모든 생산 활동에 있어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다. 과거 제주지역에서 특히 그랬다. 해녀물질, 가족 단위 농업노동, 가내 수공업, 농촌부업 등에서 여성의 역할이 매우 컸다. 아울러 의식주 생활, 의례, 혼인, 신앙생활, 육아, 가정교육 등 일상에서도 여성이 기여하는 몫이 절대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역사 정립에 있어 여성의 경제적 기여, 삶의 경험, 개인과 집단의 행위, 가치관 등을 간과하거나 사소하다고 여겨 왔다.

다행히 그간 여성특별위원회, 인재개발원, 제주연구원 등에서 제주여성사 정립을 위해 애써왔다. 특히 제주연구원에서는 제주여성 역사·문화사의 연구의미, 연구동향, 현황과 과제 등을 단계적으로 다루어 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속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제주여성 역사·문화 연구의 재활성화가 시급한 이유다.

얼마 전 후배 할머님 댁에 다녀왔다. 90세이신데도 자세가 곧으셨고 총기도 좋으셨다. 농사짓던 얘기, ‘제주 4·3’ 겪으신 얘기 등을 ‘조근 조근’ 말씀해 주셨다. 개인 생애사를 넘어 생활·문화사, 정치·경제사라 해도 손색없어 보였다. 새삼 통감했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분들 기억을 채록해 정리하고 체계화해야 한다고.

제주여성을 제쳐두고 제주 역사란 없다. 제주사 정립을 위한 제주여성사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전담기관과 조직, 연구자 확보가 시급하다. 충분한 예산확보와 행·재정적 지원은 필수다. 여러 가지로 다들 힘든 시기다. 어려운 때 해결책을 찾는데 있어 제주여성의 역사적 유산과 삶의 지혜가 그 어떤 정보나 데이터보다 더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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