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 고내봉이 한라산을 살포시 감춘 마을
영산 고내봉이 한라산을 살포시 감춘 마을
  • 제주일보
  • 승인 2020.09.1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시대 현촌 설치…주민들 바다로 눈 돌려 삶 개척
고려·조선시대 역사 품은 고내봉이 상·하가리로 뻗어

지난 호에서는 제주의 목축문화를 찾아 중산간 마을인 소길리·유수암리·장전리 마을들을 돌아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산과 바다가 잘 어울리는 고내리와 수산리의 역사문화를 찾아서 길을 나선다.

고내리 표석.
고내리 표석.

고내현에서 고내리로의 변천 과정

탐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형성된 제주의 17개현 중 귀일·고내·애월·곽지 등 네 현을 거느렸던 애월읍은, 주변 풍광이 수련하고 도내 여느 읍면보다 인구가 많은 곳이다. 1609(광해 원년) 조선조정은 한양에서 제주목을 내려다보며 좌면과 우면 그리고 중면으로 행정체제를 나눴다. 그러다가 우면 지역은 넓고 인구가 많아 1786년 동부는 신우면(애월읍), 서쪽은 구우면(한림읍과 한경면)이 되었다. 반면 제주목 동쪽은 1874년에 들어서야 신좌면(조천)과 구좌면으로 나누어졌다. 1935년 일제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면의 이름을 면 소재지가 있는 마을 이름을 사용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런 이유로 신우면은 애월면으로, 구우면은 한림면으로, 신좌면은 조천면으로 바뀌었는데, 구좌면은 면 이름이 그대로 남은 유일한 곳이다. 당시 구좌면의 면 소재지는 평대리에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고내현으로 불리어온 고내리는, 조선시대에서는 신우면 고내리로, 일제강점기에서는 애월면 고내리로 불리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유서 깊고 독특한 역사문화 유물·유적들이 산재한 고내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고내리의 설촌 유래

고내리는 고려시대 때에 이미 현촌이 설치되어 있을 만큼 오래된 큰 마을이었다. 정천이라 불리는 소하천이 마을 동쪽을 흘러 바다에 이르고 있으며 고내봉이 넓게 차지하여 경작지가 비좁아, 상대적으로 농촌보다 어촌이 넓게 형성된 지형이다. 큰우영이라 불리는 고내리 일대에서는 기와와 도자기 파편들이 최근에도 발견되었다. 병골(兵洞)이라는 지명이 고내리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 이곳에 군사가 주둔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고내포구 길 건너편에 있는 용천수인 우주물 서쪽 지경에서 옥터왓에 이르는 길을 병골길이라 한다.

고내봉에 가려 한라산이 숨어 있는 마을의 지형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고내리 선인들은 망망대해인 바다로 눈을 돌려 삶을 개척해 왔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현지 거주민보다 재일교포 인구가 갑절이나 많을 만큼 해외로 눈을 돌리기도 했다. 고내리사무소에는 연자방아로 쓰인 커다란 석기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특히 高內里 在日本 僑胞合同功德碑등 재일본 고내인 공덕비 10여 기가 전시되고 있다.

고내봉 탐방 안내도.
고내봉 탐방 안내도.

봉수대·하르방당·과원·물통을 품고 있는 고내봉

오름과 바다 사이에 형성된 마을인 고내리는 한라산이 감추어진 신비스런 마을이다. 신비를 풀 비밀은 고내봉이 쥐고 있는 듯하다. 영산 고내봉은 봉수대, 할망당과 하르당방, 과원, 물통 등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역사문화들을 품고 있는 영험한 오름이다. 더불어 상·하가리와 이웃하여 배려와 나눔의 정신을 실현해온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고내봉 전망 좋은 곳에는 많은 무덤이 들어서고 있는데,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들어선 무덤군일 것이다. 고내봉수가 들어선 이곳은 전략적으로 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금장지(禁葬地)였기 때문이다.

40여 개의 오름을 거느리고 있는 오름왕국 애월읍에서도 한라산을 숨겨주는 오름은 고내봉이 유일하다. 크고 작은 5개의 봉우리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고내봉은, 고내리는 물론 상하가리에 뻗혀있는 오름이다. 다음은 고내봉 입구에 시설된 안내 표석 내용의 일부이다.

고니오름 또는 고내오름으로 불렸고, 이를 한자를 빌어 표기한 것이 高內峰이다. 조선시대 때 오름 정상에 高內望(고내망)이라는 烽燧臺(봉수대)를 설치했기 때문에 망오름이라고도 불리며, 5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쪽의 주봉(主峰)은 망오름, 남동쪽 봉우리는 진오름, 서쪽 봉우리는 방애오름, 남서쪽 봉우리는 넙은 오름, 남쪽 봉우리는 상뒷오름이라 하고 高陵遊寺(고능유사)라는 절이 있었다.

고내봉수대 터
고내봉수대 터

▲고내봉수대(高內烽燧臺)

제주는 오래전부터 3읍성·9진성·25봉대·38연대가 촘촘히 구축되어 유사시에 적의 침입을 알리는 통신수단으로 사용하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신호를 보냈다. 고내봉 정상(175미터) 부근에는 애월진 소속의 봉수인 고내봉수가 위치해 있었다. 평시에는 한 번, 적선이 나타나면 두 번, 해안에 접근하면 세 번, 상륙 또는 해상접근하면 네 번, 상륙접전하면 다섯 번 봉화를 올렸다. 망오름이라고도 불리는 고내봉수는 북동쪽으로는 수산봉수와 남서쪽으로는 도내봉수와 교신하였으며, 별장 6명과 봉수 24명이 배치되었다. 고내봉수는 토축(土築)한 외겹 형태였다. 중심부에는 둑으로 반경 9m 주변에 둘러쌓고, 그 안에는 90cm 깊이의 골을 구축하였다. 일반적인 봉수와는 다르게 중심부에는 봉우리를 만들지 않고 밑으로 파놓았던 것이다. 고내봉수는 예전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2011년 주변의 잡목을 베어내어 전체적인 형태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고내봉수의 북동쪽으로는 수산봉수, 북서쪽으로는 남두연대와 애월연대, 그리고 남서쪽으로는 귀덕연대와 교신하였다. 이곳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이곳 봉수대를 관리하던 수군이 고내봉 남측에 주둔하며 연화지와 관립과원을 두고 연실, 연근, 귤을 진상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