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은 사라져도 명장의 이름은 길이 남는다
육신은 사라져도 명장의 이름은 길이 남는다
  • 김문기 기자
  • 승인 202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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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 최규일 선생의 절개론

(5) 명장들의 충절
추자도 주민들이 최영 장군의 은덕을 기ㄹ려 지은 사단 내 최영 장군의 위패와 영정이 걸려 있다.
추자도 주민들이 최영 장군의 은덕을 기ㄹ려 지은 사단 내 최영 장군의 위패와 영정이 걸려 있다.

사람이 사는데 지켜야 할 덕목 중 제일 중한 게 뭘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절개(지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역사상 명장다운 명장을 들라 하면 고려 최영 장군과 조선 이순신 장군이시다.

나라를 위해 몸바친 명장들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 그분들의 충절을 새겨 일깨우자 함이다.

▲최영 장군의 충절가

녹이상제 살지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 타고/용천설악을 들게 갈아 둘러메고/장부의 위국충절을 세워 볼까 하노라. (최영 ‘대동풍아’)

이 시조를 읊으면 읊을수록 최영 장군(1316~1388년)의 늠름한 기개와 호기가 넘쳐 살아난다. 이 시조가 남긴 의의는 국난 예감과 고려조 최후의 역사적 배경을 지닌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운명을 바로잡아보겠다는 최영 장군의 우국충정에서 무장다운 늠름한 기개와 충절을 읊은 대표적 충의가요 충절가다. 위국충절이 핵심어며 주제다. 제재는 명마와 보검이며, 대구법과 대유법, 추보식 구성에 직서법으로 뜻 전달 위주이다.

녹이상제는 말 중의 말 명마요, 용천설악은 칼 중의 칼 명검을 이른다. 녹이상제 명마를 맑은 시냇물에 씻어 타고 싶은 풍류의 여유도 보인다. 무장이 만일 칼만 안다면 그것은 주군을 죽인 여포의 전철을 밟기 마련이다.

무장의 칼은 예를 알아야 하고, 인을 알아야 하고, 지를 몸에 지녀야 비로소 칼의 행방을 제대로 잡을 수 있다. 최영 장군은 무인으로 늘 나라를 위한 충절을 세우기에 영일이 없었다.

▲최영 장군의 요동 정벌과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고려 말 우왕 때 가장 큰 사건은 요동 정벌과 위화도회군이다. 명나라의 영토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감행한 요동 정벌은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되찾으려는 의지에서 비롯됐다.

명나라에서 고려의 철령 이북 땅을 요동부에 예속시키겠다는 통보를 해오면서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침내 명나라가 요동부의 관리를 보내 철령위를 설치하자 최영은 우왕에게 주청하여 요동 정벌을 계획한다.

이성계는 요동 공격의 4대 불가론을 내세웠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이요,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옳지 않음이요, 셋째, 나라 안의 군사들을 모두 동원하면 그 틈을 타서 왜구의 침략이 걱정되오며, 넷째, 지금은 장마철이라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군사들은 전염병에 걸릴 것이니 옳지 않습니다.” 란 이유를 댄다.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았다.조민수는 좌군도통사, 이성계는 우군도통사로 삼고 4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 정벌을 가도록 명령했다. 이성계는 요동 공략에 반대하며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을 감행했다. 이성계는 우왕이 머물고 있던 화원의 담을 무너뜨리고 궁중 안으로 밀어닥쳤다. 최영은 붙잡혀 유배 길에 올랐다. 이성계는 최영을 고봉현으로 귀양 보냈다가 수원부로 옮겨 그곳에서 처형했다. 최영 장군은 죽음에 앞서 “내가 나라를 위해 큰일을 이루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원통하다. 오직 나라에 충성했을 뿐이다. 내가 만일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돋을 것이다”고 말했다. 최영이 죽은 뒤 그의 무덤에는 백여 년 동안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최영은 패자로, 이성계는 승자가 됐다. 흔히 역사 기록은 승자 편의 기록이라지만 인물 평가는 그렇지만은 않다. 최영의 충절과 이성계의 야욕(권력)이 엇갈린다. 최영은 위대한 명장으로 기억된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가정을 하지 않으면 역사로부터 배울 게 없다. 만일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없었더라면, 최영 장군의 요동 정벌이 이루어졌다면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해 광활한 우리 국토를 지키면서 단군조선을 계승했을지 모른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충무공 이순신 동상.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충무공 이순신 동상.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충절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올라/큰 칼 불끈 잡고(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 ‘한산도가’)

충무공 이순신(1545~1598년)이 임진왜란 때 진중에서 우국충정을 읊은 시조다. 앞으로 닥칠 국난을 예보나 하는 듯 더욱 마음을 졸이게 한다. ‘깊은 시름’도 엿볼 수 있다. 당파 싸움에 눈이 어두워 아무런 준비도 없는데 왜적은 대거 침략하여 왔으니 언제 무서운 싸움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1594년 9월. 남해안으로 전격 퇴각해 내려온 왜군들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명군은 ‘강화협상 중에는 전쟁 행위를 일체 중단하자’는 왜군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조선 수군에게 전쟁금지령을 내렸다. 선조는 (명군 몰래) 조선 수륙군 장수들에게 거제도 일대에 주둔해 있는 왜적을 공격하라는 밀지를 하달하게 된다. 이순신에게도 밀지가 전달되었다.

다음은 그날의 ‘난중일기’이다.

비가 왔다. 새벽에 밀지가 들어왔는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장수는 팔짱을 끼고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서 적을 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3년 동안이나 바다 위에 있었는데 그럴 리 만무하다. 여러 장수와 함께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자고 맹세하고 날을 보내고 있지만 험한 곳에 소굴을 파놓고 그 속에 들어가 있는 적들을 경솔하게 나가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병법에서도)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초저녁에 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는데 (작금의 상황은) 엎어지고 자빠지고 위태롭기 그지없건만 구제할 대책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어찌하랴. (난중일기 1594년 9월 3일)

이순신은 전략적 차원에서 왜군들의 발목을 한려수도 이동에 묶어두기 위해 그동안 견내량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질책성 밀지를 받자 황망하고 답답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4만명의 대군으로 조선을 다시 침략했다. 1598년 11월 19일 일본군은 전 병력을 동원해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려고 노량 앞바다에 몰려들었다. 이때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함대를 편성해 총공격해 들어갔다. 이순신은 노량에 몰려 있는 배들을 바라보면서 하늘을 우러러 “저 원수들을 모조리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1598년 7월 16일 고금도에서 명나라 제독 진린이 이끄는 수군과 이순신 장군이 거느린 수군이 합세하여 절이도 해전에서 적선 6척을 격파하고 왜적 10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진린의 배가 왜적의 배에 에워싸여 공격당하는 것을 보자 그를 구하려고 달려가다가 왜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적의 유탄을 맞은 이순신을 옆에 서 있던 조카 이완이 달려들어 부축하자 “지금은 싸움이 한창이니 어서 나 대신 싸움을 독려하여라.” 라고 말했다. 이순신 장군은 장막 안으로 옮겨져 54세에 순국하였다.

‘나라 위해 던진 그 몸 죽어서도 살았도다!’ 육신은 사라져도 이름 ‘이순신’은 살아있다. 명예는 길이 남는다. 불멸의 영웅 이순신으로 청사에 남는다. 충절로 전쟁에 승리하여 나라를 지켰다.

▲역사를 잊지 말아야

지금 우리는 역사를 망각한 채 사는 것 같다.

이젠 슬픈 역사를 기억해서 새 삶을 개척해야 한다. 아니면 망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가져야 하리다. 역사는 반복한다. 기억과 망각도 되풀이된다. 인생의 삶은 희로애락, 생로병사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고통 속에서 살지만, 오직 한 가닥 ‘희망-꿈’만을 위안과 위로 삼으면서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백조는 평소에는 울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죽을 때는 슬픈 곡조로 한마디 노래하며 죽는다. 그게 ‘백조의 마지막 슬픈 노래’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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