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하지 못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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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농업인·수필가)

태풍의 길목에 살면서,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없는 집에 돌아오는 제삿날처럼, 한 해도 거르지 않는 불청객이, 올해만큼은 큰 해코지없이 지나가기를 빌 뿐이었다. 그렇지만 야속하고도 섭섭했다. 태풍은 오불관언(吾不關焉)의 독불장군같이, 엎친 데를 또 덮치며 곳곳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그것도 불과 10여 일 사이에, 중국 전통극의 변검()’처럼 바비마이삭하이선으로 얼굴을 바꾸어 가며, 무차별적이고 가학적(加虐的)인 폭력을 자행한 것이다.

침수와 강풍으로, 애써 심고 키워 온 감자와 당근 양배추 등의 밭작물이 폐작 위기를 맞아, 농부들의 시름이 심해(深海)처럼 깊다.

감귤도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노지감귤원은 강풍에 휘둘려 나뭇가지들이 찢겨 나가고, 비바람의 노리개가 되어야 했던 열매들은, 천덕꾸러기 상처과와 부패과로 일변해 버렸다.

비닐하우스 감귤원도 도긴개긴이다. 비닐이 찢겨져 나가 만국기처럼 펄럭이고, 비에 노출되었던 레드향 감귤들은 과피(果皮)가 찢겨 나가 속살을 드러낸 열매들이 적지 않다.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여기저기 피해를 손보고 비상품 열매 따내느라, 한여름에 더운 땀깨나 흘렸다. 그 덕에 농장들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남아날 게 없을 것 같던 레드향 열매도, 예년보다는 못하지만 그런 대로 봐 줄만하게 남아 있다. 거기에다, 지긋지긋했던 장마 끝나고 이마에 와 닿는 가을 바람 삽상(颯爽)하니, 모처럼 살 맛이 난다. 뿌린 대로 거두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 필부(匹夫)의 세상살이 이만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눈을 돌려 나라 돌아가는 본새를 보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에서 열불이 나 견딜 수 없다. 종식되지 않는 코로나19, 민초(民草)들의 팍팍한 삶은 갈수록 더 위태롭고, 내우외환(內憂外患)에 대한 시름으로, 쉽게 잠들지 못하는 우울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통합과 상생을 향한 공동체의 동행(同行)이 아니라, 파편처럼 사분오열된 정파적 아집(我執)들이 좀비들처럼 민심(民心)의 광장을 흔들고 있다. 게다가 촛불로 권력을 접수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고집하며 민심과의 거리 두기로 일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민혈세를 쌈짓돈으로 생각하는 선심성 포퓰리즘의 남발로, 선거용 표() 늘리는 데 혈안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일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혼돈의 나날들. 나라의 내일에 대한 의구심(疑懼心), ‘내로남불의 오만과 독선에 빠진 국가 권력에 대한 끓어 오르는 분노가, 촌부(村夫)의 평정심을 압도한다. 요즘 이 풍진(風塵) 세상과 결별하고, TV 자연인들처럼 청산(靑山)으로 숨어들고 싶을 때가 많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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